박지연, 스물셋 나이에 지다.
삼성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한 노동자를 추모하며
박지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텔레비전에도, 신문에서도 잘 나오지 않아 누군지 알기 힘든 이름입니다.
23살, 꽃다운 나이라 부르기에도 아까운 푸르른 청춘에 저세상으로 간 노동자.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사망했습니다.
박지연씨가 인터넷에서 쓰던 닉네임은 “내가니별이다”였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 모두의 별이되어 떠나갔습니다.
1987년에 태어난 지연씨는 2010년 3월 31일 오전 11시경 운명하였습니다.
오늘(10.04.07) 한겨레에 실린 홍세화칼럼과
지연씨가 2009년 5월 15일 산재판정절차인 자문의사협의회에 참석해
최후진술했던 내용을 올립니다.
[홍세화칼럼] 스물셋 나이에 지다
오늘도 공중파 방송과 신문은 삼성전자의 분기실적이 매출 34조에 영업이익 4조3000억원이라며 크게 보도하고 있다. 지난번에도 기록적인 분기실적을 올렸을 터인데, 과문의 탓인지 그것이 서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들어본 적은 없는데 그 숫자가 자기 배도 채워 주리라고 믿는 삼성왕국의 신민들에겐 중요한 뉴스인 게 틀림없겠다. 하지만 민주공화국 시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몸의 노동자라면 그 천문학적 숫자보다 그 그늘에서 스물셋 나이에 숨진 박지연씨를 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2004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했다. 3년 뒤 급성골수성백혈병 판정을 받고 3년간 투병했지만 결국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꽃다운’ 나이라고 부르자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했음에 침전 없는 슬픔부터 앞선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건강했던 박씨가 백혈병에 걸린 이유로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된 점을 들지만 삼성왕국에서 그게 먹힐 리 없다. 대신 “병원비는 물론 낡은 집도 고쳐주겠다”며 산재 신청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여 딸자식을 공장에 보낸 가족들의 아픔을 삼성 방식으로 위무해주었다. 지금까지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는 확인된 것만도 아홉명,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로복지공단은 아무에게도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개나 소나 다 가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삼성반도체 공장에 입사했을 때 그 젊은 가슴은 어떤 꿈을 품었을까? 영혼을 팔지 않으려면 대신 육신을 ‘인간을 위한 청정지역이 아닌 반도체를 위한 청정지역’에 내던져야만 생존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한순간이라도 부르르 몸을 떨지는 않았을까? 신자유주의 지배가 강고해지면서 이 땅에서는 밥벌이의 ‘지겨움’보다 밥벌이의 ‘현장’ 자체가 더욱 무서워지고 있다.
누구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 자리’에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 존엄하게 태어난 인간,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삼성왕국에서는 그 물적 조건을 얻으려면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내던질 것을 요구한다. 한국 사회에서 전도된 가치관은 그런 방식으로 아주 간명하게 관철되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삼성 가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가수 나훈아의 지극히 예외적인 사람다운 얘기도 나오지만, 삼성 가신용 전용기의 스튜어디스들이 무릎 꿇고 서빙한다는 엽기적인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몸 자리를 보전하려고 영혼을 파는 사람이 무릎 꿇고 서빙하는 스튜어디스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또 40대 전략기획실 임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60대 계열사 사장들이 입신출세한 사회에서 절대다수가 가차 없이 팔아버렸다는 사실을.
젊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져도 삼성왕국에선 ‘별일 없이’ 잘들 살고 앞으로도 잘들 살 것이다. 그것은 한편 시장에 내다 팔 영혼의 경쟁력이 뒤떨어져 육신으로 대신 감당해야 하는 몸의 노동자들의 죽음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가령 오늘 지방선거의 열기 속에서 민생 또는 서민경제를 외치는 사람들 중 삼년 전 이맘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여 스스로 몸을 사른 서울의 택시운전사 허세욱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망자의 명복을 빌면서 속절없이 바라 본다. 저세상에는 피치 못할 현실보다 바꿔야 하는 현실의 의미가 살아 꿈틀대기를. 그래서 영혼들이 성숙하기 전에 타협하거나 피폐해질 것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기를.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2009년 5월 15일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에서 열린 최종 산재판정절차인 자문의사협의회에 참석한 박지연씨가 최후진술한 내용입니다. 자문의사협의회는 박지연씨의 백혈병이 업무상 얻은 재해인지에 대하여 2:3으로 불승인 판정을 내렸습니다.
○ 박지연씨의 최후진술서
저는 2004년 12월 27일 온양반도체(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하여 2년 8개월간 QA그룹이라는 검사과에서 일하다 급성 골수성백혈병(M1)이라는 암에 걸려 2년째 투병중인 피해자 박지연입니다.
입사한지 2년 8개월만인 2007년 9월 12일 21살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5번의 항암치료를 받아 2008년 4월 29일 골수이식을 어렵게 받았습니다.
이식후 합병증으로 응급실을 3번이나 갔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도 있었지만 고비는 넘겨 이식한지 1년이 지난 지금 2주에 한번 서울 성모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1년여동안 병원비로만 수천만원을 썼고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께 효도해 보고자 대학도 포기하고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3년도 안되어 저에게 돌아온 결과는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백혈병이라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까지 감기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했던 제가 하루아침에 생사를 넘나드는 병에 걸렸다는게 꿈만 같았고 삼성을 선택한 제가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참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충격은 더욱 컸고 감당하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엄마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에 꿋꿋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몸담아 일했던 곳은 1라인으로 Dram Front 공정부터, Mold, Finish, Gate, Test 공정까지 lotation을 돌아가며 조립,검사공정에서 제품의 외관검사 및 X-Ray 검사, Finish 공정의 품질 실험 특성검사인 도금 접착성 실험등 제품의 불량유무를 검사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Mold 공정에서 X-Ray 검사가 비중이 제일 컸고 더군다나 X-Ray 설비는 10년이 넘은 노후설비라 안전장치등 잠금장치 조차없어 바쁘게 일하다보면 설비가 켜져 있는지도 모른채 문을 열고 닫고 작업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Finish 공정에선 도금공정이 끝난 Lead Frame 자재를 날개로 잘라 Bake oven 2HR, Steam aging 8HR, 넣어 놓은 후 FLUX 라는 끈적끈적한 노란색 접착제 역할을 해주는 약품에 제품을 담구었다가 245도씨의 녹아있는 납에 담구어 솔더(납)을 입혀 제품에 솔도가 잘 입혀지는지 테스트하는 도금접착성 검사를 했습니다.
솔더가 입혀지면 세척제 역할을 하는 141B 약품에 담근 다음 SCOPE 검사를 하는 작업을 수없이 했습니다.
납에 제품을 담글 때, 하얀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는 코로 바로 흡입이 되어서 역겹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며, FLUX 용액과 141B 용액을 교체하며 다루는 과정에 화학약품이 손에 묻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장갑이라고는 면장갑을 착용했지만 약품이 그대로 손에 스며들었고 물로 씻어도 약품이 남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마스크를 하지 않았고 실험시 필요한 안전보호장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솔더 포트 장치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후두에서 불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속에서 일하며 건강만 잃고 제 인생은 송두리째 날아가버려 지금은 부모님께 불효자식이 되어서 큰 상처만 남긴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진단을 받았던 병원 교수님께서는 '화학약품을 다뤘냐'는 질문을 하셨으며, 주변에 유산을 경험한 동료도 있었고, 병이나기 몇 달 전 생리불순은 물론 하혈을 하여 방진복에 피가 묻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4조 3교대가 원칙이지만 사실상 2교대 근무에 2주 연장 야간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면역력이 저하되고 방사선과 화학약품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업무상 질병으로 충분히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5년을 바라봐야 완치가 되는 병이라고 하는데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가야 하고 재발이 되기라도 한다면 더이상 치료할 비용도 없을 뿐더러 밥벌이도 못하고 이대로 병원비, 약값으로 엄마가 식당일로 벌어오는 생활비를 다 쓰기만 한다면 생계유지가 안될것 같고, 살 수가 없을것 같아 아프고 불편한 몸 이끌고 답답한 마음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더이상 저와 같은 병에 걸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앞으로 제가 병원비, 생활비 걱정만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은 치료비 보상과 생존권 보장을 마땅히 책임져야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5월 15일
천안 근로복지공단 자문의협의회 에서 박지연 진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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