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OTL-제3부 마석 가구공장 ③13살 노동자의 귀환, 그리고…]
20년 만의 귀향, 그러나 딸에겐 국적이 없네
사우디서 8년, 한국서 12년 일하다 돌아간 방글라데시인 무띠의 비애…
‘한국에서 낳은 아이’에 국적 안 주고 가족들 현지 재적응도 험난
[2009.12.04 한겨레21 제788호]
지난호 이야기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에는 중국 동포와 몽골인,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단속에 대한 극심한 공포 때문에 자신의 문화를 길거리에서 누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 공장의 방글라데시 동료들은 소시지와 김치찌개, 자장면을 먹지 않는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한국 음식을 먹지만, 자신의 집에서는 고국의 음식을 해먹으며 향수를 달랜다. 공장 동료 피우롱과 페드로, 내 방 건너편에 사는 로미의 방을 찾았을 때 맛난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국에 있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된 노동을 견딘다. 공단에서 형이나 친인척과 함께 머물며 일하는 노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가족노동‘의 형태다. 이들에게는 자식을 잘 가르치고 먹이고 키우는 것이 하나의 지상과제다.
세상 어디든 남녀 간의 사랑은 있어, 이곳 공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필로이는 지금의 필리핀인 아내를 그렇게 만났다.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이 폐쇄적인 까닭에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한국말이 서툴다. 그들에게 ’힘들어’가 노동과 단속 걱정에 찌든 몸의 언어라면, ’괜찮아’는 나와 남을 위로하는 마음의 언어다.
‘노동’이라는 열차의 종착역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다. 이주노동자건 한국인 노동자건 결론은 다르지 않다.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은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칙칙폭폭 달려가는 노동의 목적지가 같다고 해서 출발역이 동일한 건 아니다. 마석가구공단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노동자 무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배움과 보살핌의 우산 아래 머물러야 할 나이에 일찌감치 노동의 시장에 자신을 내어놓고 돈을 벌어왔다. 그의 삶에는 저개발 국가에 태어난 이유로 국경을 넘어 몸을 팔아야 하는 아시아 노동자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 후유증 또한 만만찮다.
89년 콧수염 붙이고 사우디행
1989년 봄, 한반도는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포옹 사진이 가져다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고, 미국은 흑인 성직자와의 키스신이 담긴 마돈나의 <라이크 어 프레이어>(Like A Prayer) 뮤직비디오가 논란이 되던 4월25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담맘의 다란 공항에 낮 12시30분 비행기 한 대가 멈췄다. 7시간 전 방글라데시 다카를 출발한 비행기의 바퀴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서 앳된 얼굴의 한 소년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15명 중 유독 어려 보였다. 소년의 이름은 무띠, 당시 13살이었다. 그의 코 밑에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이 달랑거렸다. 지난 10월 말 마석가구공단 안에 있는 셋집에서 만난 무띠는 “나이 들어 보이려고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수염을 달고 갔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를 속이기 위해 여권도 위조했다. 실제 1976년생이라는 그의 여권을 보니 1966년생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초등학교 과정을 3년 만에 그만두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동의 세계로 나서는 참이었다.
무띠는 담맘의 한 대형병원에서 청소일을 맡았다. 450여 명이 일하는 병원에서 의료진은 모두 미국 사람이었고,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노동자는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맡았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청소일은 오후 3시께 끝났다. 그 뒤에도 미국인 의사의 집을 청소하거나 정원을 정리하는 잡무를 맡았다. 그렇게 일해서 고국에 있는 엄마와 두 누나, 형을 먹여살렸다.
7년 8개월의 고된 이주노동을 마치고 스무 살 되던 1997년 초 무띠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듬해 6월 이번엔 한국 땅을 밟았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는 브로커에게 1천만원을 지불했다. 경기 화성에서 휴대전화 케이스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는데, 오전 8시30분부터 11시간 일한 대가로 받은 월급은 고작 31만원. 한 푼도 안 쓰고 3년을 모아야 겨우 브로커 비용을 댈 수 있는 급여 수준으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1년여 뒤 경기 광주에 있는 종이상자 제작 공장으로 옮겼다. 월급이 7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2년 뒤 그는 한 달에 20만원을 더 받기로 하고 용인에 있는 다른 공장으로 옮겨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뼈빠지게 일했다. 수당까지 합하면 한 달에 130만원은 챙길 수 있었다.
이 공장에서 일할 때 그는 열한 살 어린 현재 아내 타냐와 ‘전화결혼’을 했다. 한국 정서상 전화로 결혼한다는 것이 우스갯소리 같지만, 자유연애를 터부시하는 무슬림에게는 익숙한 혼인 방식이다. 양쪽 부모가 자녀의 혼인을 결정하면,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녀가 전화기를 들고 몇 마디 나눈 뒤 부부가 된다.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한 식당에서 가끔씩 전화 결혼식을 치른다. 이때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자리를 함께해 축제를 즐긴다. 오랜 이주노동의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듬해인 2005년 무띠는 1년 전 결혼한 아내 타냐의 얼굴을 처음 봤다. 이미 미등록 신분이 된 그를 따라 미등록 이주노동을 자청한 타냐가 관광 비자를 얻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무띠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한국에서의 첫 직장이었던 화성의 휴대전화 케이스 공장을 찾았다. 타냐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다. 임금인상 문제로 얼굴 붉히고 등 돌렸던 사장에게 “사장님, 미안해” 하고는 취직을 부탁했다.
어머니까지 사망, ‘고아’로 귀향
무띠는 90만원, 타냐는 80만원을 받기로 한 그 공장을 반년 만에 그만둔 건 오로지 본인의 양심 때문이었다. 공장의 남성 과장은 휴대전화 케이스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플라스틱으로 남성 성기 모양을 만들어 타이와 베트남에서 온 여성 노동자들에게 들이댔다. 무띠는 사장에게 “우리 이슬람 사람이잖아요. 이런 거 안 돼”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장은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괜찮아 임마”라고 말했다.
공장을 그만둔 뒤 두 사람은 성남 모란시장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일했다. 거대한 비닐하우스 17개 동에서 자라는 상추와 겨자 등에 물과 농약을 줘 재배하고 틈틈이 수확해서 포장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05년 12월22일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났다. 서울 중랑구 ㅈ산부인과에서 임신 39주 만에 태어난 딸 파티마는 무띠에게 삶의 전부가 됐다.
그들은 비닐하우스의 지독한 농약 냄새가 어린 딸의 건강에 좋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 뒤 마석가구공단은 세 식구의 삶의 안식처가 됐다. 무띠는 마석의 다른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가구공장 도장반에서 샌딩일을 했다. 도장 작업 사이사이 샌딩기로 가구를 문지르고 빈 틈에는 사포를 들이댔다.
날이 갈수록 파티마는 쑥쑥 크는데, 미등록 노동자인 두 사람의 신분은 불안했다. 언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새 정부 들어 단속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침내 오랜 노동의 대가로 다카에 작은 집을 하나 지었다. 그래서 지난해 9월께 타냐와 파티마는 먼저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두 달 뒤 마석에는 거센 단속의 폭풍이 몰아쳤다.
무띠가 다카행 비행기에 오른 지난 11월1일은 이주노동자 삶에서 희망과 불안의 쌍곡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일단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더라도 굵어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과 희망이, ‘이대로 헤어져 살아도 내 가족이 온전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그의 고국행을 부추겼다. 전화선 너머 파티마는 “아빠가 없어 안 좋아. 보고 싶어서 한국 갈래”라고 계속 칭얼댔다.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읜 데 이어 두 달 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열세 살 때부터 이주노동을 해온 무띠는 그렇게 나이 찬 ‘고아’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방글라데시 법원 “한국서 낳은 딸은 한국인”
무엇보다 그의 고국행을 서두르게 한 요인은 하나뿐인 금지옥엽을 방글라데시 정부가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소식이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타냐가 전하길, 방글라데시 정부는 파티마가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국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단다. 출국 전 무띠는 ㅈ산부인과에서 발행한 영문 출생증명서를 내게 보여주면서, “출생증명서를 방글라데시 정부에 제출했는데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거주한 지 오래된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자녀에게 체류 자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무띠가 방글라데시에 가면 파티마는 ‘무국적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
“형, 어떡해. 법원에 갔어. 우리 파티마 방글라 사람 아니래.” 11월25일 전화선 너머 무띠가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다. 법원에서 파티마를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상급법원까지 대여섯 번 찾아갔는데도 인정받지 못했다며 곤란함을 호소했다. 방글라데시 법원은 한국에서 낳은 아기니까 한국 사람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무띠는 내게 세 식구가 한국에 올 수 있는 서류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잠시 뒤 타냐가 전화기를 낚아챘다.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게 “형, 다른 데(나라)는 아기 거기서 낳으면 (영주권) 다 주는데, 한국은 왜 안 그래요?”라며 따졌다. 속지주의와 속인주의의 차이를 전화로 설명하려다 포기했다.
이들은 파티마보다 한 살 더 많은 알리프도 똑같은 처지에 있다고 전했다. 알리프의 엄마는 지난해 11월 마석가구공단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단속 때 출입국단속반원들에게 잡혔다. 엄마만 방글라데시로 강제출국당할 뻔했으나, 가구공단 사람들이 “엄마만 보내면 아기는 어떡하느냐”고 항의해 알리프도 함께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한겨레21> 742호 ‘아파도 아프지 마라, 마히아’ 참조). 그런데 알리프 역시 현지에서 방글라데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알리프의 아빠는 여전히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타냐는 “신랑이 돌아오니까 좋다”면서도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한 뒤 고국에 돌아가 겪는 재적응 스트레스를 그도 겪고 있었다. 특히 여성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무슬림 사회에서 벗어나 외국 바람을 쐬어본 타냐로서는 더욱 그런 듯했다. “여자들 여기 안 좋아요. 계속 집에만 있어야 해요. 밖에도 잘 못 가고…. 우리나라 여자들 그래요. 한국 좋잖아요. 거기서는 일도 하고, 맛있는 것 먹고, 친구도 만났는데….” 타냐는 전화 말미에 파티마 문제를 다시 꺼냈다. “파티마 한국에서 낳았으니까 한국 아기예요. 형, 잘 생각해봐요.”
이주노동의 3막은 어디에서
무띠는 오로지 가난 때문에 어릴 적 배움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국제 이주노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는 이주노동의 2막을 끝냈다. 3막은 언제 어디서 펼쳐질지 모른다. 그의 딸 파티마는 부모가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무국적자가 됐다. 수많은 아시아 민중이 이처럼 고단한 노동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도 아시아 국가다, 그나마 먹고살 만한…. <전종휘 기자>
한국말은 늘었어도 병원 문턱은 여전
1년 만에 다시 만난 ‘무국적 아이’ 마히아…보험 적용 안 돼 감기 진료에 6만원
마석에 있는 동안 마히아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마히아는 지난 1월2일치 <한겨레21> 742호 표지이야기 ‘아파도 아프지 마라, 마히아’에 등장한 어린이다. 서울 망우리에서 태어나 올해 네 살이 됐지만 여전히 한국 국적도 없고 부모를 따라 방글라데시 국적도 얻지 못한 무국적자다. 얼마 전엔 문화방송 < PD수첩 >에 소개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에 가서도 무국적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파티마의 현재는 마히아의 미래이기도 하다.
김치·달걀이 점심 반찬
10월29일 낮에 찾은 ‘샬롬의 집’ 보육실. 마히아는 여전히 감기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날도 감기 때문에 쇼칼(방글라데시)·랜델(필리핀)과 함께 구리에 있는 종합병원에 다녀왔다. 모두 건강보험 적용 제외 대상이라, 간단한 진료를 받고 일주일치 감기약을 타는 데 1인당 6만원이 들었다고 보육교사 김갑숙씨가 설명했다. 김씨는 “마히아는 아직도 감기를 달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 만났을 때보다 마히아의 한국말 실력이 부쩍 늘었다.
-마히아, 안녕. 아저씨 알아?
=알아요.
-어디 아팠어요?
=머리.
-콜록콜록 기침도 했어?
=응.
-의사 선생님이 약 먹으면 낫는대?
=응.
-점심 반찬은 뭐 먹었어요?
=김치랑 달걀이랑.
-지금도 집에서 ‘달’(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즐겨먹는 국) 안 먹어요?
=응, 안 좋아해.
옆에 있던 교사 김씨가 “마히아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묻자 마히아는 “한국 사람”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말 이 어린이집에 다니던 아이들 가운데 베티가 지난 8월 말 부모와 함께 인도로 돌아간 것을 빼고는 큰 변화는 없다. 낮잠 시간을 맞아 이불을 깔고 누운 마히아에게 여전히 할 수 있는 말은 “아프지 마라”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한글을 모르는데다 외부 접촉도 가능한 한 삼가기 때문에 아이들 보육에 관한 정보에 둔감한 편이다. 교사 김씨는 “이주노동자 부모의 경우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한국 부모의 30% 정도 수준인 것 같다”며 “관심이 있더라도 언제 단속당해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들은 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어떻게 될까
‘세계이주민의 날’(12월18일)을 앞두고 12월15일 국회에서는 ‘이주아동 권리보장,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 발의를 앞두고 김동성 한나라당 의원실이 주최하는 이번 토론회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의 담당 공무원과 시민단체가 참가해 관련 법안 내용을 놓고 토론할 예정이다(<한겨레21> 779호 ‘이주아동 인권보호 한 발 내딛나’ 참조). 김 의원이 발의하려는 법은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한국에서 3년 이상 체류한 모든 이주아동에게 영주권을 주고, 의료보험 혜택과 중학교 의무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히아는 물론 파티마와 알리프 모두 그들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순전한 부모의 선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이다. <전종휘 기자>
‘노동 OTL’ 3부를 읽고…
100만 이주민 시대, 전향적 이주노동 정책을
그들을 껴안으면 태부족 기능직 인력 보완하고 저출산 문제도 대비할 수 있어
<한겨레21>의 ‘마석 이야기’를 읽는 동안 지난 5년간 경기 남양주시 마석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공기압축기를 이용한 ‘타카’에 의해 전종휘 기자의 엄지손가락에 박힌 핀만큼이나 아픔이 저미어왔다. 마석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가슴에 박힌 처절한 현실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인 레벤(가명)이 2005년 마석에서 표적단속을 당해 강제출국되기 직전 쓴 ‘달 전화기’라는 한 편의 시는 이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새벽까지 일하고 기숙사 갈 때
하늘 끝의 달 보며 눈물 흘린다
엄마 생각난다
엄마 생각난다
이슬 맺히는 눈에
달 보며 물어본다
우리 엄마 건강하니?
나를 꿈꾸던 어머니"
마석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이들
이들은 왜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의 품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서러움을 감당해야 할까? 전종휘 기자가 취재한 많은 사연들처럼 이주노동자의 어깨에는 이중 삼중의 짐이 놓여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고국에서의 행복한 삶이라는 희망이 이주노동자의 몸뚱아리를 하나로 감싸고 있다. 그 애절함을 짓누르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단속’이다.
경춘국도를 지날 때 거쳐야 하는 터널이 하나 있다. ‘마치터널’이다. 이 터널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서울 방향에서 춘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서울 방향에서는 분명 비가 오는데, 불과 30m도 안 되는 터널을 빠져나가면 눈이 온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구릉지대에 마석가구단지가 있다. 그곳은 1960년대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이다. 사회에서 격리되고 버려진 척박한 땅에서 양돈사업으로 삶의 희망을 일구던 곳이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터는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가구공단이 조성됐다. 가난과 고통을 대물림받은 이주노동자들이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곳이다.
그곳에서 이주노동자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피부색도 말도 달랐지만, 분명 그들도 나와 같은 붉은 피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2003년 매서운 추위가 강습하던 겨울.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강행했다. 당시 이주노동자 10명이 단속의 공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석에서는 지병을 앓던 한 이주노동자가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숙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2007년에도 마찬가지로 합동단속이 예고됐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불법단속·강제추방에 반대하는 집회’를 계획했다. 마침 그 무렵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피랍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내 정서상 이주노동자의 집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계획을 철회하려 했다. 그러자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피랍된 한국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를 같이 하겠다고 제안했다. 집회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한국인들의 무사 귀환 기도회’로 바뀌어 열렸다. 이주노동자 300여 명은 자신의 종교의식으로 기도회에 참가했다. 이슬람교·힌두교·불교·기독교식으로 기도했다. 촛불을 하나씩 들고 경춘국도로 나가 한국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분명 한국이 ‘제2의 고향’이었다. 그들은 때로 나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
그 사이 한국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진행됐다. 최근에는 100만 이주민 사회를 맞아 다문화 시대에 진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에 와서 세계경제의 침체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잠식하고 외국인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외국인 범죄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편파적이고 왜곡된 측면이 많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피랍 한국인 무사 귀환’ 빌던 이주노동자들
내국인과 외국인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 차별화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예컨대 특정 성씨나 지역의 성범죄율이 높다는 식의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범죄 문제에서 굳이 외국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지목하는 것은 외국인을 사회적 해악이자 잠재적 범죄자로 단정해 낙인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존의 한국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면 불쌍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동정주의’를 지니고 있다.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고서도 이들을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내국인과 외국인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려는 차별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다문화 사회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거부하는 행위다.
정부는 최근 해외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중 국적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체재비(1인당 연간 1천만원 한도)까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상위 2%에게만 특혜를 주는 이 정부의 다른 정책과 닮았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115만 명가량의 이주민이 있다. 그러나 이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70만의 이주노동자는 ‘국가경쟁력’이라는 허울 좋은 정책에 의해 소외되고 배제돼 있다. 더욱이 한국 산업발전에 오랫동안 기여한 숙련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철저한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강압적인 추방정책으로 일관한 결과 각종 인권침해 사건이 불거졌고 국제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돼왔다.
이제는 전향적인 이주노동자 정책이 마련될 시점이 됐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다문화 사회로 편입함으로써 효율적이고 안정된 산업구조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 악몽은 언제쯤 사라질까
2007년 중소기업청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능직 인력은 다른 직종과 비교했을 때 수요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기술직 및 준전문가는 수요 대비 부족분이 3.79%, 서비스업은 1.57%, 판매관리직은 3.53%였으나 기능직은 7.40%나 됐다. 대략 3만9500명 정도다. 이런 부족분을 메우는 데 숙련 인력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활용하면 사회적 비용 부담을 줄이는 방안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앞으로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맞닥뜨릴,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를 위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어느 날 네가 말했지. “형, 어제 단속되는 꿈 꿨어” 하며 침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어. 남자들이 간혹 제대 뒤 다시 군대 간 꿈을 꿀 때의 기분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 그런 너를 보며 나는 “내가 널 꼭 지켜줄게”라고 약속했어.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형! 살려줘”라며 외마디 신음소리가 전화기로 전달되었고, 너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쫓겨 공장 3층에서 떨어져 두 다리가 골절되었지. 두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국을 떠나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야 했던 나는 오늘도 악몽을 꾸고 있어. 이 악몽이 언제쯤 사라질까. “동생, 미안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이영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사무처장>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편협한 나라의 국민이어서 미안해요”
“공장의 먼지도, 단속의 공포도 여전할 텐데 내 손가락의 상처만 벌써 나았네요”
앗살라무알라이꿈!
무슬림들이 만날 때 하는 인사말. 어둠이 내려앉은 마석가구공단의 거리를 걷던 그대들은 뚜비를 머리에 쓴 채 만나는 방글라데시 동료들과 이렇게 인사했지요. 한국말로 “잘 가요”는 ‘발로꼬레젠’이라는 것도 배웠어요. 제가 공단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가네요.
불안에 떨던 수줍은 미소가 잊히지 않아요
어때요? 아직도 공장 문을 굳게 잠근 채 일하나요? 출구를 찾지 못한 그 많은 톱밥 먼지와 소음은 그대로 코와 입과 귀로 들어가겠지요. 여전히 하루에 한두 번은 합판이 들어올 테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납품할 물건을 포장해야지요. 월요일을 뺀 매일 밤 야근을 하고 그 뒤에는 집에 가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을 테고요.
기사에서 그대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쓰면서도 많이 조심스러웠어요. 실수로라도 진짜 이름을 썼다가 그대들의 존재가 한국 땅에서 순식간에 ‘삭제’될까봐 저는 계속 조심했어요. 혹여 공장과 일,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좋은 단속 정보가 될까봐, 독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더 생생하게 현실을 전하지 못했어요. 만약 누구 하나 추방당한다면 저는 얼마나 괴로울까요?
그대들과 함께 조립식 주택의 방에서, 마석의 술집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 귓가를 맴돕니다. “생각해봐, 형” 하면서 단속이 얼마나 그대들의 영혼을 파먹고 있는지 설명하던 그 눈망울. 불안과 불만이 9 대 1만큼 섞인 그 눈동자, 그 동공에 초점을 맞추는 내 마음도 어지간히 불편했더랬지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니요. 이런 모순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우리 공장 방글라데시 총각 삼총사 가운데 가장 귀엽게 생긴 피우롱. 도장반에서 머리에 허옇게 먼지와 도료를 덮어쓴 채 샌딩기를 돌리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피우롱은 내게 “도장반에서 일 오래 하면 성기능에 문제 생긴다”고 했죠. 그렇지 않기를 바랄게요. 나중에 방글라데시 가서 예쁜 여자 만나 결혼하고 귀여운 아기도 낳아야지요.
출롱은 아직도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나요? 똘망똘망한 눈매의 출롱이 어느 날 저녁 야근을 앞두고 난로에 나무를 너무 많이 집어넣는 바람에 땀을 줄줄 흘리며 일했던 생각이 나요. 내가 기자인 걸 알고 나서는 “형, 진짜 우리 얼굴 나오면 안 돼요”라고 신신당부했죠. 그럼요. 나중에 ‘나라’에 간 뒤 작은 배 한 척 사서 친형하고 운수업 해야지요. 그때까지 돈 많이 벌어야지요.
페드로 형. 나보다 한 살 많다고 내가 형에게 “형” 하고 부르면, 형도 자꾸 나를 “형” 하고 불렀죠. 난 좀 이상했어요. 그런데 어제 방글라데시에 전화해서 파티마 엄마 타냐와 통화하는데 그 스물두 살짜리 여성도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거 있죠. 어쨌건 형의 수줍은 미소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마리아 누나는 어때요? 아직도 밤이면 소주를 마시고, “힘들어”를 입에 달고 사나요? 언제 기회가 되면, 단속 걱정에 14년 동안 남양주시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누나를 제 차에 태우고 강릉 경포대 바닷가에 가서 오징어회에 소주 한잔 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될까 모르겠어요. 함부로 약속은 하지 않을게요. 아참, 그리고 누나 방에서 술 마실 때 내가 얘기했지만 딸 아밀렌과 내년에 미국에 가더라도 너무 기댈 생각은 하지 말아요. 마석에서도 힘겨운 삶을 이어온 누나가 미국에 가서 딸 눈치 보고 살게 되면 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그러니….
경포대에서 함께 소주 한잔 하고 싶지만
서울도 찬바람 쌩쌩 부는데 마석은 또 얼마나 추울까 걱정됩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그대들에게는 삶인 고단한 노동을 잠시만 경험하고 떠나서 미안합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필요할 땐 놔두고 그렇지 않으면 기를 쓰고 붙잡아 나라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그런 편협한 민족국가의 국민이어서 미안합니다. 그대들의 아픔은 여전한데, 타카핀 박힌 내 엄지손가락의 상처는 다 나아서 미안합니다. 발로꼬레젠.
2009년 11월26일 전종휘 드림
*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한 노동OTL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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