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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OTL-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③사장님, 손님, 남편님

뚝배기92 2010. 1. 15. 14:41

[노동 OTL-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③사장님, 손님, 남편님]

이보다 더 낮은 삶을 어디서 찾으리오

식당 아줌마 짓누르는 손님·사장·남편의 3중 억압구조…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그들의 이름은 ‘사람’

[2009.11.06 한겨레21 제784호]

 

 

지난호 이야기

한 달 동안 ‘데자뷔’를 느꼈다. 서울 A갈빗집과 인천 B감자탕집. 서로 다른 식당에서 닮은꼴 아줌마들을 만났다. 그곳엔 외환위기 이후 몰락한 가장의 부인들이 있었다. 1990년대 말, 제조공장이 무너지고 정리해고가 횡행했다. 자영업자가 늘었다. 몰락 가장의 부인들이 식당으로 떠밀려왔다. A갈빗집 팀장 언니도, B감자탕집 주방 언니도 ‘사모님’에서 ‘아줌마’가 됐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재기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입히고 먹여야 했다.

 

절박해서 시작한 일, 그만두기 어렵다. 돈을 많이 모아 식당일을 ‘탈출’하긴 쉽지 않다. 100만원을 벌어 10만원 저축하기도 힘든 삶이다. ‘낙오’하긴 쉽다.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생겨 일을 못하게 되면 낙오한다. 그렇게 식당 앞치마는 벗지만 생계는 막막하다. 식당 아줌마들은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럴수록 몸은 더 약해져간다. 악순환이다. A갈빗집 현숙(가명) 언니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고서야 10년 만에 식당일을 쉬게 됐다. 감자탕집 주방 언니는 끔찍한 생리통을 견디면서 자궁의 혹을 안고 산다.

 

아줌마들의 꿈은 성공일까. 갈수록 계층간의 벽이 견고해진다. 식당 아줌마의 자식들이 다시 식당일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녀가 다시 비정규 노동의 수렁에 빠진다. 빈곤노동에 찌든 삶에 곧 겨울이 온다.

 

 

식당 아줌마는 ‘여성’ 노동자다. 권력관계로 보자면 ‘사장’ 아래다. 서비스업이란 업종 특성상 ‘손님’ 밑에 자리한다. 가부장제 구조에서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지배를 받는다.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식당 아줌마는 최하층이다. 식당의 일상에서는 이 ‘3중 구조’가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식당 아줌마는 늘 사장을, 손님을, 남성을 받들고 챙기고 돌봐야 한다.

 

 

1. 손님의 무릎

 

"힘든데 여기 좀 앉아서 해."

 

한 손님이 자기 무릎을 토닥이며 말했다. A갈빗집의 저녁 시간, 소갈비를 주문한 중년 남성들이었다. 비싼 고기를 태울까봐 조심조심 굽고 있는데, 손님의 눈길이 끈적하다. 다 익은 고기를 건네며 “드세요” 하니 “먹으라네” 하며 낄낄댄다. “몇 살이야?” “아이고, 피부가 곱네.” 한참을 희롱한다. 그러고는 힘든데 서서 일하지 말고 자기 무릎에 앉아서 하란다.

 

그의 앙상한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내 허벅지가 더 튼튼해 보인다. 황당함과 불쾌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계속 추파를 던졌다. 순간, 미자(가명) 언니가 내게 다가와 가위를 뺏어들었다. “우리 막내한테 찝쩍거려서 일 그만두게 하려고 그래요?” 미자 언니의 공격에 뜨끔한 것도 잠시, 남자는 “그럼 자기가 한 잔 따라봐” 한다. “저 지금 가위 들고 있거든요. 말조심하세요.” 미자 언니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손님이 진한 농담을 하면 못 들은 척하거나 강하게 나가야 해.” 그날, 일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는데 언니들이 입을 모았다. “특히 아까 그 손님은 ‘진상’으로 유명해. 조심해야 돼.” 우리끼리 ‘블랙리스트’도 만든다. 밖에서 만나자고 명함을 주는 건 점잖은 축이란다. 엉덩이를 슬쩍 만지거나 손목을 잡는 이도 있다.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술을 따르라 하기도 한다.

 

손님의 ‘수작’을 ‘호의’로 봐선 안 된다. A갈빗집 지숙(가명) 언니의 일화는 유명하다. 40대 싱글인 그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꿈을 꿨다. 식당에 와서 팁까지 후하게 주는 한 손님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가 지숙 언니에게 일 끝나고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넸다. 며칠 뒤 지숙 언니가 와서 직원들에게 “어제 외박했다”며 그와의 관계를 자랑했다. 이후로 그 손님은 오지 않았다. 언니들은 “지가 그러면 그 손님이 결혼이라도 해줄 줄 알았느냐”며 수군댔다. A갈빗집을 그만둔 지숙 언니는 인근의 다른 갈빗집에서 일하고 있다.

 

반말·모욕·희롱 일삼는 ‘진상’ 손님들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은 여성 노동자에게 ‘당연한 듯’ 요구된다. 손님은 음식점에 와서 음식을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식당 아줌마가 돌봐주길 바란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고 정답게 굴길 원한다. 정당하게 돈을 내고 받는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서비스’(service)의 어원은 ‘노예’를 의미하는 라틴어 ‘Servus’다. ‘돈’을 매개로 ‘노예’를 부리니 미안함이 덜하다. 식당 아줌마들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큰소리라도 내는 날에는 “이 식당은 서비스가 왜 이 모양이냐”는 불만이 날아든다.

 

식당 아줌마들은 손님, 사장, 동료 순으로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을 꼽았다. 2006년 한국여성연구소가 서울시내 식당 아줌마 40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다. 손님과의 관계에서 식당 아줌마의 25.7%가 ‘반말·욕설 등 비인격적인 대우가 힘들다’고 답했다. 홀 근무자의 경우 30.9%다. ‘불쾌한 성적 농담’은 전체의 14.9%, 홀 근무자의 19.1%가 경험했다. 12.6%가 ‘술 좀 따라보라’는 말을 들었다. 홀 근무자의 11.7%가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무시당하고 희롱당한 장면 장면이 수치 위로 아른거린다.

 

A갈빗집 언니들은 그래도 화장을 한다. 거울을 보고 멋을 낸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홀 근무자가 지저분하게 하고 있을 순 없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홀서빙 지원자를 돌려보내는 사장을 본 터다. 더욱이 갈빗집의 경우 잘만 하면 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웃으며 고기를 잘라주는 일은 우리의 ‘본분’이다. 남성 손님의 시중을 들 때면 립스틱 바른 입술이 불안하다.

 

 

2. 사장의 혀

 

‘전무님’은 독설가다. A갈빗집 여사장의 남편이다. 왜 ‘전무님’이라 불러야 하는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회사원인 그의 직책이 전무란다. 갈빗집과는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식당 종업원들은 그를 ‘전무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심지어 사장조차 자기 남편을 ‘전무님’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전무’는 ‘대통령’쯤 됐다.

 

앙칼지긴 하지만 소심한 편인 여사장과 달리 ‘전무님’은 대범하다. 상대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고려하지 않는다. 어느 직원이든 마주치기만 하면 잔소리를 한다. 그 때문에 식당 언니들은 그를 피했다. 식사 시간에 그가 오면 함께 식사하지 않으려고 밥을 굶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팀장 언니가 그만두기로 한 날, 그가 식당에 나타났다. 직원들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상을 차려놓은 상태였다. ‘전무님’이 먼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직원들은 아무도 앉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봤다. 팀장 언니가 “다 같이 얼른 먹고 일어나자”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직원들이 상에 앉자마자 ‘전무님’의 악담이 시작됐다.

 

“요즘 다들 돌아가면서 그만둔다 어쩐다 하나 보지? 우린 이 가게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사람들이야. 일하기 싫으면 당장 때려쳐. 나이도 많으면서, 어디 가서 일할 데 구해봐! 구해지나. 고마운 줄 모르고….”

 

밥 한술을 떠넘기려던 직원들이 움찔했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전무님’은 한 명씩 지명해가며 잔소리를 했다. “미자 넌 싫다고 나가더니 다시 들어온 소감이 어때? 아주 웃겨요. 소감문이라도 하나 쓰지 그래?” 그만뒀다가 다시 일하기 시작한 미자 언니에게 비아냥거렸다. “경희 너는 우리 볼 때만 살살 일하고 안 보면 논다며?” 40대 여성 노동자에게 50대 ‘전무님’은 ‘너’란 호칭을 거리낌 없이 쓴다.

 

화살은 다시 팀장 언니를 향했다. “오너 입장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 줄 알아? 직원들이 아프다고 하는 거야. 지난번에 최 팀장, 팔목 아프다고 파스 바르고 일했지? 얼마나 보기 싫은 줄 알아?” 팀장 언니가 발끈했다. “식당에서 소주 박스 내리다가 다친 건데 깁스 안 하고 파스 붙인 채로 일해주면 오너 입장에서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시끄러워! 내 말에 토 달지 마. 내 말은 듣기만 해!” ‘전무님’이 소리쳤다. 다들 고개를 숙였다.

 

하인·노예 대하듯 온갖 잡일 시켜

 

B감자탕집 사장은 50대 남자다. 그는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터프가이’다. 키도 크고 몸집도 크다. 흰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의 부인도 머리 모양이 비슷하다. 안경 너머 눈매가 매섭다. 직원들은 그를 ‘사모님’이라 불렀다. 사장은 매일 오전 9시 가게에 들른다. 1시간쯤 머문다. 저녁에는 7시께 부인과 함께 들렀다 간다. 가끔은 애완견과 함께 온다. 애완견이 용변을 본 신문지를 치우는 일도 우리 몫이다.

 

사장은 터프가이답게 불같은 성격이다. 주·야간 언니들은 사장과 대화하길 꺼렸다. 지난 3개월 동안 왜 휴일을 주지 않느냐고, 아픈데 좀 쉬면 안 되느냐고 묻지 못한다. 150평 식당에 주방 1명, 홀서빙 1명을 둔 채로 언제까지 운영할 거냐고 묻지 못한다. 심지어 손님이 많아 가게가 전쟁터인 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사장에게 전화해 일할 사람을 요청하라는 내 요구에 주방 언니가 마지못해 전화를 했다. “사장님… 오늘 좀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홀로 온 사장은 주방과 홀 사이에 서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이, 저기 18번 가봐.” 38번에서 밥을 볶아주는데 사장이 말한다. “이거 밥을 이렇게 볶아주면 어떡해?” 18번에서 주문을 받는데 사장이 38번 테이블을 내려보며 호통을 친다. “손님 들어오잖아, 얼른 물 나가야 할 거 아니냐.” 전광판에 ‘77’이란 테이블 번호가 깜박인다. ‘77’은 카운터 자리 번호다. 사장이 카운터에 앉아 손님이 왔다며 벨을 울려댄다. 9번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나는 ‘77’이란 빨간 숫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말했다. “네 손님, 어서 오세요!”

 

감자탕집 사장이 싫어하는 것은 세 가지다. 직원들이 감자탕 뼈다귀를 먹는 것, 직원들이 식당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는 것, 직원들이 앉아서 ‘노는’ 것. 언니들은 재료를 사와서 집 반찬을 만들고도 사장 눈치를 본다. “현관 앞 계단 좀 닦아라.” 앉아 있는 나를 본 사장은 득달같이 일을 시켰다. 이후로 사장이 가게에 있을 때는 마늘 손질도 서서 했다.

 

사실 사장도 사정이 좋지 않다. 갈수록 장사가 안 된다. 아끼던 수천만원대 오토바이도 2개월 전에 팔았단다. “이 동네는 다들 못살아서 장사할 데가 못 돼.” 근무 첫날, 사장이 내게 말했다.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나은데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가난뱅이야. 감자탕 시킬 일 없는 사람들이지.” 5천원짜리 뼈해장국 말고 2만7천원짜리 ‘감자탕 대(大)자’를 팔기 바라는 사장은 ‘뒷문 손님’을 무시했다. 뒷문은 동네 골목과 맞닿아 있다.

 

석 달째 휴일 안 주는 사장님의 큰소리

 

자영업자는 장사가 안 되면 직원을 자른다. B감자탕집도 최소 인원인 주방 1명, 홀서빙 1명만을 뒀다. 그 때문에 누구도 쉴 수 없다. 3개월째 주·야간 직원들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24시간 영업하는 감자탕집은 3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사장은 잠깐씩 가게에 들르니 12시간씩 120일 연속 근무를 하고 있는 이들의 고충을 알 리가 없다.

 

B감자탕집을 그만두겠다고 한 날, 식당에는 천둥소리가 났다. 그만두는 이유를 묻는 말에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일도 힘들고 남편도 그만두라고 해서요.” 일전에 A갈빗집 팀장 언니가 귀띔해준 ‘멘트’였다. “남편이 그렇게 잘났느냐? 지금 당장 네 남편 데려와!” 안하무인이었다. 결국 “직원들 3개월째 쉬지도 못하게 하는 곳이 어딨느냐”고 따져물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일 힘들다는 사람 필요 없으니까 당장 가방 갖고 나가!” 사장은 흥분했다. 그에게 식당 아줌마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리를 키워라, 배추를 길러라, 식당일이 아닌 일까지 시켜도 불평 못하는 언니들은 사장의 ‘완벽한 노예’였다.

 

 

 

3. 그들도 사장처럼

 

"뭐 맛있는 거 드시나?"

 

B감자탕집 건물 관리인이다. 키는 훌쩍 크고 얼굴은 희고 번들번들하다. 색이 들어간 안경을 낀다. 직원들이 사장 다음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능글능글 웃으며 식당으로 들어선다. 하필이면 직원 점심 시간에 딱 맞춰 왔다. 밥 한 숟가락을 뜨려는 우리 옆에 서서 상 위를 훑어본다. 우린 콩나물국을 먹고 있었다. “나도 콩나물국 먹고 싶은데… 그럼 같이 먹을까?” 그러고는 주방 언니와 내가 앉은 테이블에 덥석 앉는다. 주방 언니는 말없이 밥 한 공기를 내왔다. 고작 10분, 밥 먹을 동안의 휴식도 사라졌다.

 

그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거의 매일 감자탕집에서 식사를 한다. 하루는 그가 사장 앞에서 주방 언니에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아줌마들이 메뉴에 없는 거 먹더만… 나도 그거 주면 안 되나?” 직원들이 가끔 콩나물국이나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다. 사장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주방 언니에게 명했다. “앞으로 소장님 오시면 원하는 메뉴로 만들어드려.”

 

그때부터였다. 관리인은 시도 때도 없이 김치찌개나 콩나물국을 요구했다. 손님이 많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상관없다. 그가 원하면 해줘야 한다. 메뉴에 있는 음식의 경우 재료가 미리 준비돼 있기에 같이 섞어 데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김치찌개, 콩나물국은 집에서 만들 듯 한 그릇씩 따로 준비해야 한다. 매번 한숨을 내쉬면서도 주방 언니는 재료가 되는 대로 묵묵히 음식을 만들었다.

 

메뉴에도 없는 음식 요구하는 건물 관리인

 

한데 곧 ‘관리인의 친구들’도 등장했다. 친구들도 관리인을 따라 아무 음식이나 주문했다. “주방 아줌마 없나?” 관리인의 친구들은 식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주방 쪽을 보며 건들거린다. “여기, 콩나물 해장국 하나 줘요.“ 한 사내가 말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콩나물 해장국이오? 그런 건 메뉴에 없는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에이, 관리소장 먹는 거 있잖아, 그걸로 줘요. 주방 아줌마가 알 거야” 한다. 주방 언니에게 다가가 큰소리로 물었다. “언니, 오늘 콩나물 없죠?” 한데 언니는 또 한숨을 쉬고는 콩나물 해장국 끓일 준비를 한다. 속이 터진다. “다들 자기 집에서 밥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남자들일 거야.” 주방 언니는 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A갈빗집에서도 동네 건달부터 ‘전무님’ 친구들까지 식당을 들락날락했다. 그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재떨이 달라” “커피 내와라” “누룽지 좀 먹자”며 식당 아줌마를 부린다. 사장이 그들 편이라면, 식당 아줌마는 그들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 갈수록 내가 어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업무의 경계가 흐릿하다. 분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식당 아줌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는 사실이다.

 

 

4. 서방님의 전화

 

"씨X, 진짜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주방에서 뼈해장국을 끓이던 언니가 갑자기 욕을 해댄다. 늘 순종적인 언니의 새로운 모습이다. 가만 보니 전화 통화 중이다. 언니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고는 팔팔 끓는 뚝배기를 내려놓았다. 주방 언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딩동, 19번 테이블 호출이다. 뛰어갔더니 냉면 맛이 이상하다며 바꿔달란다. 냉면 그릇을 들고 주방 언니에게 달려가니 갑자기 그가 국자를 집어던진다. “다들 정말 나한테 왜 이래!”

 

손님들이 다 나간 뒤 커피를 건네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남편 때문에 못 살겠어.” 언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며칠 전, ‘근로장려금’이란 것에 대해 알게 됐다. 부부 합산 연간 총소득이 1700만원 미만인 근로자 가구에게 올해부터 연간 최대 120만원까지 지급된다고 했다. 이 제도를 통해 정부는 ‘근로빈곤층의 빈곤 탈출을 지원하고 사회 안전망을 확충’할 계획이란다. 그것이 빈곤 탈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언니에게 120만원은 오아시스 같은 돈이었다.

 

한걸음에 달려가서 받고 싶었다. 하지만 주방 언니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감자탕집에 묶여 있는 몸이다. 그는 남편에게 전화해 근로장려금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다. “난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니가 알아서 해.” 전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남편의 말에 언니는 폭발했다.

 

하필 이날은 주방 언니가 ‘대출금상환연기신청서’도 제출해야 했다. 한 보험사에서 1500만원을 대출받았는데 상환일이 되도록 갚을 길이 없다. 원래는 인천 부평역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 가서 직접 접수를 해야 한다. 한데 갈 시간이 없다. 팩스로 신청서를 넣으라기에 언니는 팩스 기계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건물 관리인에게 부탁했다가 안 되자 길 건너 문방구로 달려갔다. 팩스를 보내려고 가게를 비운 사이 사장이 왔다. 언니는 땀을 뻘뻘 흘렸다.

 

‘나몰라라’ 남편에게 화내보기도 하지만

 

집에 김치도 떨어지고 이튿날 싸줄 애들 도시락 반찬도 없다. 식당에서 일하는 언니는 걱정이 산더미다. 의자 제작 공장을 하다가 5년 전 부도를 맞은 남편은 지금껏 일용직을 전전한다. 일을 못하는 날이 더 많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김치를 담그지 못한다. 아이들 도시락 반찬을 만들지도 못한다. 하지만 남편을 욕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날 주방 언니는 화를 삭이며 감자를 볶았다. 채를 썰어 파와 마늘을 넣고 달달 볶았다. 점심 식사 때 조금 내놓고는 나머지를 검정 비닐봉지에 넣었다. 오후 4시, 하굣길에 중학생 아들이 가게에 들렀다. 아들에게 검정 비닐봉지를 건넸다. “집에 가서 아빠랑 동생이랑 이걸로 저녁 먹어. 다 먹지 말고 조금 남겨놔. 내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게. 알았지?”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섰다. 자동문이 <클레멘타인> 음을 길게 토해내고, 노랫소리가 다 끝나도록 주방 언니는 아들의 뒷모습을 좇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성 빈곤 노동자의 삶을 더욱 빈곤하게 하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다. 손님과 사장과 남편과 남자들에 치이고 무시당해도 이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다. 여성이고, 노동자이고, 빈곤해서다. A갈빗집 미자 언니 같은 여성 비정규직이 439만 명이다. B갈빗집 주방 언니 같은 기혼여성 장기 임시근로자가 200만 명이다. 식당에서, 마트에서,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이들이다.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다. <임지선 기자>

 

 


 

‘노동 OTL’ 2부를 읽고…

“우리끼리 서로 알아주고 연대하자”

혼이 반쯤 달아난 듯한 식당 아줌마가 눈에 들어오며 절로 돕게 되더라

 

 

얼마 전 회식이 있었다. 갈빗집.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회식팀들이 여럿이다. 식탁 숯불마다 빠짐없이 자글자글 고기가 익고 있다. 넓은 홀에 손님들이 등을 마주댈 정도로 가득 들어차 왁자지껄하다.

 

직접 물병·재떨이·반찬 챙긴 회식 자리

 

그리고 빼곡한 식탁과 손님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달리는 여자들도 있다. 홀 벽에 붙어 있는 전광판에 붉은 글씨가 뜬다. “호출 7번.” 그때마다 딩동, 기계음이 울린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귀기울여보면 쉴 새가 없다. 그런데 그건 아주 일부분이다. 호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소리쳐 부르는 손님들이 훨씬 더 많다. “아줌마, 고기 더 주문받아요.” “언니, 소주 두 병 더.” “여기, 물 좀!” “불판 다 탔잖아요. 아까 갈아달라니까!”

 

나는 눈치껏 벌떡벌떡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오고, 재떨이를 가져오고, 다 먹은 반찬 그릇들을 챙겼다. 동료가 타박을 주었다. “그냥 불러서 시키면 되잖아.” 이때다 싶어, 말했다. “<한겨레21> 임지선 기자 체험 기사 읽어봤어? 안 읽었으면 말을 마.”

 

그때 그곳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은 혼이 반쯤 달아난 듯했다. ‘식당 아줌마’가 된 임지선 기자도 그랬다더라. 그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임지선 기자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을 때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고 썼다. 몇 달 몇 년을 일하시는 분들에게 민망스러워도 진심이었을 거다. 나도 자신 없다. 나 역시 월소득 120만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니, 돈은 둘째 치자. 하지만 나는 12시간 일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일하다가는 우선 내 체력과 건강이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러면 이분들은 강철 체력을 가진 슈퍼우먼들일까? 모르긴 몰라도 약값과 병원비로 솔찬히 나갈 것이다. 아니다. 병원 갈 시간이 없겠구나. 하루 12시간 노동, 한 달 1~2일 휴일로는.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100만 명에 달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이 2009년 3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숙박음식점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92%, 99만4천 명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가장 많은 산업 부문은 도·소매업으로 126만 명이다.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거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다. 직종별 분류로 해도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서비스직과 판매직에서 비정규직은 10명 중 8명으로, 200만 명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 여성들을 어디에서나 마주친다. 식당·가게·마트,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비정규직의 한 달 임금 소득은 124만원 정도다. 정규직 253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실 여성 비정규직은 이보다도 더 낮다. 김유선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남성 정규직 시간당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여성 정규직은 67.4, 남성 비정규직은 50.8, 여성 비정규직은 겨우 39.1에 불과했다. 남성들은 그래도 정규직이 더 많은 반면,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이 65%라는 점까지 고려해보면, 여성들의 일자리는 대개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떳떳하게 어느 직장에 다닌다고 말하기 머뭇거려지는, 용역직이나 일용·임시직 일자리들이다. 또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의 65%가 여성이다.

 

혹시라도 “여자들 일하는 거야 집에만 있기 뭐하니까 여윳돈 좀 벌려고 부업 삼아 나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집에만 있기 뭐해서 하루 10시간씩 일하리?”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위기는 여성을 대거 노동시장에 나오게 만들었다. 돈을 벌던 남편들이 실직하거나 망했고 다시 일을 하게 되더라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여성이 일하러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런 사정들은 임 기자의 기사에도 잘 나와 있다). 여성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몰아넣는 것은 빈곤이다. 그러나 이 일자리는 빈곤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엄마들이 해오던 일’로 가치 폄하

 

그럼 왜 여성의 일자리는 이렇게 비정규직이고 저임금일까? 임지선 기자의 체험 기사를 읽은 독자라면 “여자들 일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리 없겠지만, 일자리의 성격 자체에 바로 이러한 관념이 구조화돼 있다. 여성 비정규직의 일들을 보자. 주로 가사노동의 연장선이거나 감정노동 또는 돌봄노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사노동 : 밥하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 식당일도 그렇고 지하철이나 병원, 학교 건물들을 청소하는 분들은 거의 여성 노동자다. 육체적 노동강도로 따지면 무지하게 힘들다. ‘힘이 센’ 남성이 할 법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여성의 일로 간주된다. 원래 집에서 엄마가 하던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감정노동  :상냥하게 웃으며 대하는 일. 판매대의 점원, 식당 홀 서빙하는 사람, 상담원, 안내원, 텔레마케터 등. ‘고객은 왕’인지라 손님이 진상을 부려도 울컥 올라오는 울화는 목구멍까지만 눌러두고 미소를 지어야 한다. 하도 미소를 짓다 보면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것도 여자의 일이다. 여자는 상냥하고 온순하며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하게 대응할 줄 알기 때문이란다. 하긴 가정에서 남편을 즐겁게 해주고 아이들을 달래고 시부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가.

 

돌봄노동 : 아이나 환자, 노인을 돌보는 일. 보육교사,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 이런 일자리가 늘어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은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가정 내에서 여성이 엄마나 딸, 며느리로서 무급으로 봉사해야 할 테니까. 물론 노동시장의 일자리가 되어도 여전히 여성의 일이다. 그리고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면 100만원쯤 버는 비정규직이다.

 

자원을 지닌 기업의 역할 중요

 

이런 일들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할 수 있고 하는 일로 간주된다. 원래 가정에서 엄마들이 다 해오던 일이 아닌가. 특별한 자격이나 기술이 없어도, 돈도 안 받고 당연히 하던 일. 그러니까 정규직 직원으로 고용할 필요도 없고 임금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저임금의 일차적 원인은 노동시장의 상황, 즉 빈곤에 내몰려 이런 일자리라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란 꼭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사회적 힘, 예를 들어 조직력이나 일에 대한 사회적 가치 평가 같은 것도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이 점에서 여성 노동은 가정에서 ‘엄마들이 당연히 해오던 일’의 연장선상으로 간주되면서 크게 가치가 폄하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 문제가 아니다. 자본이 여성 노동자를 값싸게 이용하는 전략으로서 사회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해가면서 유지되는 체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시장의 상품 관계로 편입된다. 집에서 해먹던 밥을 자주 식당에서 사먹게 되고, 옛날에는 집에서 놀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게 된 것도, 이러한 상품 관계가 생활에 더 깊숙이 침투하는 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비스 업무는 자동화되기가 어려운 편이므로 특히 고용 구조에서 상대적인 비중이 높아진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부분들이 비록 시장적인 방식일망정 사회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은폐된 가정 내에서 재생산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여성에게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부문의 일자리란 것이 노동시장에 나온 여성에게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떠맡겨진다는 점이다. “어차피 집에서 여자들이 돈 안 받고 매일 하던 일하고 비슷한데, 뭐”라는 명목으로. 자본주의는 이윤 창출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과 더불어, 거기서 노동력을 싸게 이용하는 방법도 찾아낸다.

 

저임금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정책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자인 나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게 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특히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더 그렇다. 어쨌든 정책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자원을 가진 것은 기업이니까.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나도 그렇고 <한겨레21>을 읽는 독자의 다수가 노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우리 노동자끼리 서로 사정을 알아주고 연대하고 지지해야 한다.

 

식당만 가면 유난히 종업원들의 ‘서비스 정신’을 감시하고 투덜거리는 친구가 있다. “이 식당은 왜 이렇게 불친절해!”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식당 노동자들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불친절할 가능성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역설적인 것은,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고 그래서 서비스·판매직 여성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강화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수행하는 노동자를 같은 노동자이자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손님을 기쁘게 해주는 ‘기계’로 볼 뿐이다.

 

‘투명인간’ 아닌 ‘사람’으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미국 추리소설이 있다. 그녀는 식당 손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추리를 해낸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참 이상하지. 내가 옆에서 청소를 하거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나봐.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들 얘기를 하거든. 식당 종업원이란 투명인간 같은 거야.” 또 한 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내게 한 말도 있다. “전에는 화장실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들어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볼일을 봤다. 내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자, 그때서야 그 아주머니들이 들어오면 흠칫하게 되더라. 그전에는 그 여성 노동자를 아예 인식하지도 않은 거다.”

 

노동자 연대의 출발점은 간단할 수 있다. 서로를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보고 사정을 알아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한겨레21> 노동 OTL 기획 기사의 취지도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사회학 박사>

 

 

 


 

‘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발 한 달에 이틀은 쉬세요”

“내가 떠나 더 힘들 텐데…

하루의 절반을 일하고 가족까지 챙기는 언니들이 아름다워요”

 

 

요즘도 <클레멘타인>이 귓가에 맴돕니다. 자동문이 열리고 <클레멘타인>이 울리면 손님이 들어왔죠. 그 넓고 넓은 감자탕집. 물과 물통, 물수건을 챙겨들고 주문을 받고 반찬을 챙기고…. 하루 12시간 반복했던 잡다한 업무들이 기억 속에 빼곡합니다. A갈빗집과 B감자탕집의 언니들, 잘 지내고 있나요?

요즘도 매일 점심시간이면 저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습니다. 그곳에는 지난 9월의 제 모습이 있죠. 갈빗집 언니들의 모습이 있고 감자탕집 언니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음식을 건네받을 땐 고맙고 반찬을 더 달라 할 땐 미안하죠. 넓은 식당에 종업원이 1~2명만 있으면 안타깝습니다. 몸은 노동 현장에서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계속 노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시 식당에서 일하는 팀장 언니

 

어느새 단풍이 지천이네요. 함께 일할 때만 해도 더웠는데 말이죠. 어제 퇴근하다가 회사 앞 아파트 단지를 보니 붉게 물들었더라고요. A갈빗집 앞길, 양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무들도 노랗게 물들었겠죠. B감자탕집 뒷마당의 나무는 앙상하겠네요.

 

갈빗집 팀장 언니, 요즘은 용역회사를 통해 일용직으로 일하신다고요. 근무 중에 전화를 받아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언니의 모습은 지난 9월의 제 모습이죠. 언니가 갈빗집을 그만둔 뒤, 고등학생 딸은 “엄마가 집에 있으니까 정말 좋다”고 했다면서요. 한데 언니는 그 딸의 학원비를 마련해보겠다고 또 일을 나왔군요. 지독한 아이러니예요, 그렇죠?

 

감자탕집 주방 언니, 언니에겐 계속 미안합니다. 9월25일, 제가 그만두겠다 말한 날이죠. 사실 사장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았어요. 우릴 착취하는 사장에겐 불만이 쌓여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만두면 당분간 더 힘들어질 언니를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죠. “아이고, 인제 또 어떻게 일하냐. 적응된 줄 알았는데 그만둔다니….” 언니는 제 얘길 듣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요.

 

사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당장 가방 들고 나가라”고 했을 때 언니를 봤어요. 언니는 차마 제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더군요. 인사를 하는 내게 언니는 “나중에 전화해”라고 속삭였어요. 감자탕집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맺혔어요. 미안함, 무서움, 억울함이 뒤엉켜 있었죠.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에 서서 식당을 바라봤어요. 저는 이제 감자탕집에서 도망쳤지만 언니는 계속 그 안에서 살아가겠죠. 패배감을 느꼈습니다. 감자탕집 옆으로 식당이 즐비했지요. 식당마다 언니들처럼 일하는 이들이 있겠지요. 몸이 아파도 속이 상해도 앞치마 둘러매고 일하는 이들이 있겠지요.

 

아무튼 그날, 고생 많았어요. 150평 식당, 혼자 얼마나 바빴겠어요. 사장 내외가 많이 도와줬냐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하긴 뭘 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 있더군요. 그날 밤 9시, 야간조 언니들이 와서 얼마나 놀랐을까요.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와 야간 언니들에게도 죄송합니다.

 

9월16일 갈빗집에서 42만원이, 10월16일 감자탕집에서 35만원이 입금됐습니다. 통장에 박힌 사장님들의 이름을 보니 섬뜩하더군요. 77만원을 위해 전 이들 소유의 식당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한 것이지요. 우리 노동력은 그렇게 헐겁게 거래된 거였죠.

 

부탁합니다. 감자탕집 언니들, 11월엔 제발 한 달에 이틀이라도 꼭 쉬세요. 언니들은 원래 ‘곰과’라서 미련하다고, 그래서 자기 것도 못 챙겨 먹는다고 하셨죠. 그래도 이렇게 살면 나중에 복받지 않겠냐고 하셨죠. 그러면서도 몸이 아파서, 집안 살림이 엉망이라서, 한 달이 너무 길어서 괴롭다고 하셨죠. 3개월째 못 쉬었다며 서로 위로하는 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쉬세요. 언니들은 휴일을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봤자 한 달에 두 번이잖아요.

 

사장에게 말하기 어렵다면 함께 말하세요. 손잡고 함께 말해요. “저희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언니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장도 별수 없지 않을까요. 터프가이 사장이 또 소리를 버럭 지르겠지만 어쩌겠어요. 휴일은 언니들의 권리인걸요.

 

“쉬겠다”고 손잡고 함께 말해보면 어떨까요

 

제가 만난 언니들은 모두 열심히 사는, 아름답고 강한 여성들이었습니다. 하루의 절반을 일하고도 가족을 챙기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노동력을 바치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언제쯤 돼야 이 빈곤 노동이 끝날까요. 절망하긴 쉽습니다. 희망을 가지려면 용기가 필요하죠. 그래도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한다면 희망이 절망보다 빠를 겁니다.

 

언니들, 건강 잘 챙기세요.

 

2009년 10월30일 식당 막내 임지선 드림

 

 

*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한 노동OTL에서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