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OTL-제1부 안산난로공장 ③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떠나는 섬
일할 때도 쉴 때도 말문을 닫은 그들에게 연애는 넘기 힘든 ‘작업’
[2009.10.09. 한겨레21 제780호]
지난호 이야기
악몽을 꾼다. 공정 도구를 무심한 컨베이어벨트 사이로 떨어뜨린다. 반장에게 혼난 뒤부터다. 반장이 무섭다기보다, 그의 스트레스가 라인을 타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진다는 사실이 미안하다. 아침 6시53분이면 무심하게 떠나는 통근버스를 놓치는 꿈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현실에 있다. 고된 노동의 종점이 가난이 되는 역설은 눈을 뜰 때 더 선명해지는 악몽이다. 정규직으로 10년 넘게 일했던 공장이 금융위기로 문을 닫고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최근 A사로 와 한 달 116만원을 겨우 받은 40대 후반의 가장, 15년 동안 식당일만 하다 힘에 부쳐 시급 4천원짜리 공장으로 온 40대 여성, 사업이 망해 빚을 지고 최저임금 노동에 내몰린 20~30대…. 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으므로 공장의 충실한 기계가 된다. 하루 최대 13시간을 A사 공장에서 산다. 공장은 자동 타이밍으로 종을 쳐 근무·휴식 시간을 명령하고, 날품·정규직·반장의 근무복을 구별해 관리하고, 목장갑마저 아낀다. 날품과 원청 사이 인력회사들은 잔업수당, 특근수당을 후려치거나 파견직의 퇴직금을 갈취하려고도 한다. 이제 공장은 ‘단순 공정’에 정규직을 뽑을 이유가 없다. 비정규직은 일거리가 줄면 돈을 받지 못한 채 쉬어야 한다. 막장 노동의 비정규직은 속수무책 ‘빈곤’과 ‘절망’으로 인도된다.
‘9번 기계’는 4주를 일해 80만8070원(9월 첫 주치 추산 합계)을 벌었다. 안산에 집을 구해 직접 한 달 생활을 꾸리며 ‘인간’이 되고자 했다. 깜냥 정한 ‘행복의 조건’대로 생활·여가·외식비 등을 지출했다. 15만원 남짓 남았다. 희망은 남지 않았다.
1. 저마다의 오아시스
“덥다고 무조건 찬물만 마시지 말고 뜨거운 물도 한 잔씩 해야 돼.”
“그럼, 나도 그러고 있지.”
(난 그럴 수 없다. 애인도 없고, 8월19일은 정말 미치도록 더운 날이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이와 한참 통화를 하더니 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8시간에 150만원? 야, 좋겠다.”
“난 뭐, 난로 만드는데…, 잔업을 풀로 해야(안 빠져야) 130만원 정도 받는 것 같던데….”
(우리 라인 사람인가? 어, 월급이 그것밖에 안 돼?)
“스트레스가 많나 보네. 야, 이게 뭐가 부러워?”
촉촉했던 20대 후반 남성의 목소리는 친구로 보이는 이와 통화하며 말라갔다. 8월19일 밤 9시40분 퇴근길 회사 버스는 피곤만으로도 만원이었다.
그래도 퇴근 버스 안은 식사 시간과 함께 드물게 노동자들의 ‘말’이 살아나는 때다. 출퇴근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공장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비로소 편린으로 전해진다. 공장 밖 사람과 다르지 않다. 연인이, 가족이, 꿈이 그 이유다.
“영어 단어 두 번씩 써놔. 검사할 거야.”
지난 8월11일 점심 시각.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비정규직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가 커진다.
“오늘 비 오는데 먼지 나도록 맞겠구만.”
함께 식사하던 비정규직 여성의 추임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듯 보이는 3명의 여성이 왁자지껄한다.
“아, 미치겠어. 학교에서 아이 갯벌 체험 숙제 있다고.”
“그걸 언제 가냐.”
“그러니까 아예 사진 날짜 없애고 등만 찍어서 다음번에 또 써먹는 거야.”
“야, 우리 아이 염색했어!”
“하하하.”
하지만 공장엔 섬 같은 이들투성이다. 식사도, 휴식도 홀로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미래를 전망하는지 서로 알기 어렵다. 인사 한 번 안했으나 눈에 익던 이가 사라지면 불안만 가중될 뿐이다.
염철수(28·가명)씨는 같은 인력회사를 통해 A사로 온 이들 가운데 술 한잔이라도 나눴던 이들이 공장을 떠날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저 형은 다음주부터 일산에 있는 회사 기술직으로 들어간대요. 돈도 더 많이 받아요. 다들 가네요”라고 내게 말할 때마다 대꾸를 찾지 못했다. 나 역시 떠날 이였다. 하필 계절조차 가을로 쓸쓸히 건너간다.
희망이 타들어가는 담뱃재
비정규직은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게 없다. 제각각 학교를 졸업한 뒤,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을 줄이고 기쁨을 배가할 ‘소속’이 없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은 철저히 원자화돼 있다. 상대적으로 쉽게 ‘무리’가 형성되는 여성 세계와 크게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성 노동자들의 꿈은 때론 비현실적으로 보였고, 때론 소박했다. 하지만 11시간을 서서 일하며 홀로 곱씹고 담금질한 까닭에 다들 절실했다.
A사의 정규직도 염두에 뒀던 정원식(24·가명)씨는 돈을 벌어 카페를 차리는 게 목표다. 재학 중인 지방대엔 미련이 없어 보인다. “등록금만 비싸다.”
염철수씨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용접공으로 근로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 “그곳에선 종일 일하지도 않고, 임금도 넉넉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각주 1)
그런데 학원비가 300만원이다. 밤에 부업이라도 할까 계획했으나 “매일 잔업하느라 엄두를 못 내겠다”고 그는 말한다.
안산 ㅇ공고를 올해 졸업한 하민우(20·가명)씨도 가게를 갖고 싶어한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치킨가게, PC방 등을 오고 갔다. 배달은 밤 근무가 많아 위험하다. 대신 시급이 높다. 그런데도 중고 오토바이 하나 사니 남는 돈이 없다. 그는 ‘폭주족’이 아니다. 한 푼이라도 모아놓고 군대를 가려고 8월13일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던” 공장문을 두드렸다.
쉬는 시간마다 야외 휴게소가 (대부분) 남성 노동자로 미어터진다. 민우도 원식씨도, 철수씨도 한 자리씩 잡는다. 건조한 공장 마당 앞에서, 말없는 낙타들처럼 등을 구부리고 목을 뺀 채 저 멀리 오아시스를 내다보는 것일까. 하지만 담배 하나 물고서, 걸어도 걸어도 라인 위인 것은 아닐까.
2. 여공들의 생일파티
지난 8월30일 저녁 경기 수원에 있었다. 여공들만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59년생 ‘왕언니’가 계셨고, 25살 여대생이 있었다. 수원 일대도 단순 제조공장과 인력회사들이 상당하다. 만만치 않은 ‘인간시장’이다. 전자·휴대전화 대기업들의 하청업체가 많다.
모두 9명이었다. 50대 1명, 40대가 2명, 30대 후반이 3명, 30대 초반이 2명, 그리고 20대가 1명.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전등이 켜져 있고, 폭죽을 터뜨리려 하고, “야, 그럼 안 되지” 하고, 전등이 꺼지고, 노래를 또 부르고, 나는 입만 옹알대고, 박수 소리 커지고, 또 폭죽을 터뜨리려 하고, 결국 폭죽이 터지고, “25살 맞지?” 하고, 촛불이 꺼지고, 생선회와 튀김이 드나들고, 소주가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 쉴 새 없이 쌓이던 날, 시간은 참 잘도 갔다. 왜 라인만 벗어나면 시간은 빠른가 생각했을 때, 여공들의 화제는 집값부터 모임 운영 방식, 공장까지 더 빨리 오고 갔다.
나명희(50·가명)씨는 인력회사에 대한 불만이 특히 컸다. 피자가게를 운영하다 접고 2004년 처음 수원의 공장에 들어갔다.
“처음 일자리 구한다고 갔는데, 난 본청의 인사과인 줄 안 거야. 근데 왜 회사가 따로 있나 했거든. 나중에 보니 인력회사더만.”
“나도 그랬어요.”
“저도요.”
“하하하.”
“잠깐 일했던 회사에서 19만원 정도 예상했거든. 그런데 16만원만 주는 거야. 노동청에 제소한다고 했더니 차액을 주겠대. 나 원 참. 그럼 나처럼 말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런 게 한둘이 아니라니까.”
“전 퇴직금 못 받아서 제소했어요. 그랬더니 주더라고요.”
“그래? 나도 200만원 정도 못 받은 게 있는데, 상황 좀 보고 결정해야겠어.”
“우린 수당 계산도 엄청 이상하게 해. 저녁 8시30분에 일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5시30분에 끝나고 잔업을 2시간 더 하는데, 그냥 일괄적으로 4천원에 잔업만 1.5배야. 맞아?” (각주 2)
비정규직 여성들의 이중고
“모르니까 따지지도 않는다니까. 난 안 그래. 한번은 생산부장이 열심히 해서 목표량 채우면 저녁 8시40분에 끝내주겠대. 그래서 불량도 최소화하면서 끝내고 정말 가려고 했지. 근데 영업과장이란 자가 와서 소리를 박박 지르면서 이 사람들 1시간씩 (급여를) 까라고, 도대체 위계가 없다고 무시하는거야. 그래서 따졌지. 위계는 당신이 없는 거라고, 생산부장 말대로 해 끝낸 건데 뭐냐고. 그랬는데 다음날 사장한테 불려갔어.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회사) 나왔지, 뭐.”
화자가 누구냐가 도대체 중요치 않다. 사연들은 겹치고 겹쳐 그냥 ‘비정규직 날품’이다.
한 공장에서 만난 비정규직 여성끼리 친분이나 쌓자며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7개월이 지났다. 이젠 다른 공장에 다니는 이가 생겼고, 잠시 쉬는 이도 있다. 생일을 맞은 25살 나희원(가명)씨는 올해 대학(미용학과)에 들어갔다. 공장에서 4년간 돈을 벌었다. 본인에 대한 최초의 ‘투자’가 된다. 모임은 이제 경조사까지 챙겨준다.
식당일 하다 1년6개월 전 공장으로 들어온 김영순(40대·가명)씨. 야근조다. 아침 8시가 넘어 귀가한다. 집안일을 거들면 오전 10~11시가 된다. 그가 사는 임대아파트 위 중천으로 해가 지나면 겨우 눕는다. 그는 “일만 있다면 쉬지 않는다”. 그래도 저축이 안 된다. 지난달엔 일요일 딱 두 차례 쉬었다. 그중 하루가 이 모임일이다. 또래 연대나 소속, 소통이 왜 얼마나 중요한지 증거한다.
“(여고생) 딸이 일본어를 잘해서 대학 들어가 공부를 더하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당장 고등학교 등록금만 해도 한 번에 30만원 되니까.”
김영순씨는 “여길 어떻게 온 건데, 마셔야지요” 하며 소주 한 잔 털어넣는다.
“겨우 집을 사서 왔는데, 남편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고…. 그래서 또 이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최은숙(30대·가명)씨도 음료수 한 잔 턴다.
이들은 가끔 야유회도 다닌다. 공장과 집안, 두 일터에서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이 오직 자신의 관절을 위무하고 제 얘기로 웃고 우는 자리가 된다. ‘아름다운 세대’가 모임의 이름이다.
절망과 희망이 실시간으로 충돌하는 저들의 대화에 낄 틈이 적다. 난 미안한 마음으로 근로기준법에 관한 각주와 상자기사나 달 뿐이다.
3. 공장의 행복
8월25일, 공장은 조금 들떠 있었다. 7년차 정규직 김희숙(40대·여)씨가 단서를 줬다. 두 달에 한 차례씩 지급되는 상여금이 들어온 것이다. 95만원. 오후 4시 휴대전화로 입금 문자를 확인한 김씨는 “이때를 보고 일하는 거야, 힘들어도”라고 말한다. 상여금 230%짜리 ‘날품’도 그의 환한 웃음에 전염돼 웃는다. 그는 “오늘은 내가 남편한테 쏘는 날이야”라며 “저녁 8시에 퇴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따로 비상 주머니는 안 만드세요?”
“난 그런 거 없어. 호호. 남편은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 9시에 끝나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맥주 한 잔은 해야지. 하하하.”
결국 이날은 밤 9시에 끝났다. 김씨가 ‘10번 공정’을 맡은 지 하루 만에 붙였던 손바닥만한 파스도 이날 9시까지 꼭 붙어 있었다.
반장은 처음으로 라인 노동자들에게 박카스를 돌렸다. 회사가 준 건지 제 돈을 쓴 건지 모른다. 후자이길 바랐다. 나는 그가 좋았다.
회사는 목표량을 초과 달성한 팀의 순위를 매겨 1위에겐 100만원, 2위 70만원, 3위 50만원의 회식비를 다달이 준다. 실상 비정규직들이 받는 유일한 ‘가외수당’이다. 우리 라인도 지난 7월에 70만원을 받았단다. 그래봐야 두당 2만원꼴이다. 밥 먹고 맥주 한 잔 하면 없다.
‘왕고참’ 정성훈(40대 후반·남·가명)씨는 “그거 누구 코에 붙이냐”면서 “차라리 쉬는 시간마다 음료수 하나씩 돌리면 더 안 좋겠나”고 묻는다. 무엇이든 상상만으로 좋다. 화석처럼 굳은 노동자들 표정에 미소 하나 긋는 일, 참 쉽다.
마흔 넘은 노총각들은 늘어나고
공장은 젊은 남녀로 넘친다. 적잖이 묘한 눈빛이 거래된다. 어떤 여성에 대해 언급하면 염철수씨도, 정원식씨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나만 항상 늦다.
하지만 ‘행복의 필수조건’이 되는 연애나 연대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특히 불리하다. 열심히 눈빛을 보내도 회신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돈만이 가치를 말하는 시대에, 남자의 100만원과 여성의 100만원은 크게 다르다. 실제 A사의 반장들 가운데도 노총각이 적지 않았다. 이미 마흔이 넘는다.
한 정규직 여성은 말했다. “남자들이 새로 들어오는 여자한테 작업을 많이 거는데, 잘 안 되는 것 같더라. 여자는 임금도 적고 성도 안 차니까 나가거든.”
이들의 ‘연애 장애’가 한 문장으로 설명되긴 어렵다. 수원 지역 공장에서 일하다 잠시 쉬고 있는 조수미(32·여·가명)씨는 연애를 꺼리는 여성을 세 유형으로 정리해줬다.
1. 잔업·철야 등 생산일의 특성상 연애가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각주3)
2. 시급 4천원짜리한테 연애는 사치다. 돈 벌기 바쁘다.
3. 좀더 괜찮은 여자가 됐을 때, 좀더 괜찮은 남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럼에도 A사의 젊은 노동자들은 볼품없는 근무복의 깃을 세우고, 이른 아침 잠을 쪼개 머리를 단장하고 온다. 욕망은 언제나 현실보다 강했다.
이 때문에 원초적 행복이 좌절됐을 때, 이들은 ‘일탈’을 유일한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 시화공단 인근의 정왕동(시흥시)과 안산 시내 번화가엔 유흥업소가 즐비하다. 여느 공단 도시 주변과 다를 바 없다. 주점·노래방 등이 넘친다.
즐비한 유흥업소에서의 기억들
정왕동은 일본 관광객까지 찾는다고들 한다. 거기다 이 지역엔 다방이 많다는 점이 달랐다. 이른바 ‘티케팅’으로 성매매가 가능한 업태다. 1990년대 군부대 도시나 농촌에 유행하던 형태인데, 수도권 복판에서 남성(노동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제 자취방이나 여관으로 커피 배달 여성을 불러 12만~15만원의 화대를 치른다.
도시는 이들을 노동자로 직접 포섭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 유흥업에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공장엔 많았다. C는 남자 노래방 도우미를 했다. 1시간에 3만원을 받는다. 일주일에 세 차례 ‘선택’받고 뭐하나 싶어 공장으로 왔다.
D는 3~4년 전 ‘바다이야기’ 성인오락실에서 일했다. 한 달에 300만~400만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안마시술소와 노래방을 다녔다. 남은 돈이 없다.
E는 다방 카맨(운전)을 잠시 했다. 선배에게 신세 지는 대신 ‘여자’를 실어날랐다. 시화 일대에서 가장 큰 다방 가운데 하나로 업소 권리금만 10억원이라 한다. 명함·휴지·라이터 등 광고비만 매달 2천만원 정도를 썼다. 여성들은 한 달에 500만원 정도를 벌었으나 그가 번 돈은 없다.
친구와 살았던 곳(본오동)은 유흥지대에서 멀다. 일대가 모두 주택가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문 앞엔 다방 명함들이 흩날렸다. 연애조차 이들에겐 힘든 ‘공정’이다.
4. 에필로그
‘노동’의 목적이 노동이 될 순 없다. 그러나 종종 헷갈린다. 밤 9시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면 항상 10시가 넘었다. 들어가면 대체 할 수 있는 게 없다. 8시간 뒤엔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 말곤 없다.
막장 노동자의 여가가 더 적은 이유가 있다. 대체로 일터가 멀다. 공장은 더 값싼 부지를 찾아 점점 더 멀리 간다. 내가 본래 사는 경기 성남 내 공단 역시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어, 거주 시민들도 보통 40~50분 통근 시간을 감수해야 했으나 이마저도 하나둘 광주로 이전했다.
딸 데려오겠다며 웃던 그도 떠나고
차를 갖고 다니는 친구의 귀가 시간은 저녁 8시 전후다. 회사가 평택에 있다. 도착하면 그는 항상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고 있다. 나는 샤워를 한다. 땀에 전 검은색 근무복을 함께 빤다. 털어 널고 ‘4번 공정’처럼 맥주를 꺼내 마신다. “정말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투정하면, 친구는 사극 <선덕여왕>의 덕만 공주에 대해 얘기한다. 노동일기를 적다 잔다. 11시30분만 넘어도 나는 다음날 피곤할까 불안했다.
지난 8월24일 A사에 들어와 닷새 만에 자취를 감췄던 옌볜 출신 재중동포(42). 그는 3년 전 한국에 들어와 다닌 공장만 5곳을 넘게 꼽는다. 이달 추석 이전에 고향에 홀로 남겨졌던 딸(6)을 아버지가 데리고 오기로 했다.
보지 않아도 안다. 딸 얘기를 하며 윗앞니 빠진 입안을 훤히 드러내 보였던 그는, 고되더라도 급여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찾아갔을 것이다. 실제 그는 친구가 다니는 회사가 화성으로 이사올 예정인데, 자기를 소개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기숙 공장이다. 주근에 야근, 그리고 철야를 한 뒤 다시 주근하는 ‘살인 노동’이 가능하다.
“아니 그럼, 가족이랑 떨어져 살아야 하네요?”
“주말에 보면 되지, 뭐.”
근로빈곤의 유전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에선 언제나 단내가 난다. 공장은 무관심하다. 무단결근 2~3일이 되면, 자연스레 근태표에서 이름을 지운다. 공장은 철수, 원식, 지원, 영순, 은숙이 아닌 그냥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밤 9시 퇴근을 알리는 종이 친다. 여기저기서 휴~, 소리가 낮게 퍼진다. 오늘 산 자는 내일 다시 온다. 일을 그만둘 즈음 새벽은 차가워졌다. 출근길마다 보았다. 새벽이 사람을 깨우지 않는다. 사람이 언제나 새벽을 깨운다. 그런데도 악몽은 좀체 깨지질 않는다. 위정자에 달렸고, 경영진에 달렸으며, 나머지가 노동자 몫이다.
근로기준법의 역설
과거엔 ‘최대치’, 지금은 ‘족쇄’
노동력을 착취하고 수당을 후려치는 인력회사나 사용자의 ‘용이주도함’에 대한 불만은 따지고 보면 근로기준법을 겨눈다.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잘 모를 뿐이다. 1970년대 살인적인 노동 현실에 분신으로 항거했던 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남겼던 외마디가 이젠 때로 족쇄가 된다. 70년대 근로기준법은 최선이고 최대치였으나, 지금은 필수며 최소치다. 물론 이조차 지키지 않는 기업이 여전히 많다.
2회 기사에서 전했던, 노동자들의 일부 잔업이 통상 본급의 1.5배가 아닌 1.25배로 계산되는 것도 2006~2007년 개정된 근로기준법의 ‘연장가산수당’ 관련 조항에 근거한다. 주 5일제 적용 기업의 경우, 최초 잔업 4시간은 잔업수당으로 본급의 1.25배를 적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영악하고 인색하다. 엄연히 1.5배를 쳐주는 기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일한 A사가 그렇다. 게다가 1.25배 수당 관련 규정조차, ‘매달 최초 4시간’ 내지 ‘매주 최초 4시간’ 따위로 업체마다 제각각 해석해 적용하고 있다.
지역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근 기업이 1.5배를 쳐주면 인력이 필요한 이상 다른 기업도 올려주지 않을 수 없다. 김영순(가명)씨가 일한 B사처럼 인근의 경기 수원 지역 다른 공장들도 1.25배 적용이 일반적이라는 게 이곳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아직 주 5일제가 적용되지 않는 20인 미만 기업은 주 40~44시간을 본급 근무로 간주하고 그 이상 근무를 잔업으로 쳐 1.5배를 주게 돼 있다.
수원의 한 30대 중반 여성 노동자는 “당시 근로기준법 개악의 핵심은 생리휴가가 무급화로 인해 사실상 폐지된 것과 연·월차 휴가 통합으로 휴가가 축소된 것, 그리고 1.25배 수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일했던 공장의 임금 체불과 부도에 맞서 급히 결성된 노동조합에서 활동한 바 있다.
하지만 거개 노동자들은 제 급여가 어찌 계산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노조가 있는 제조업체도 드물다. 당연히 부당함을 발견하기 어렵고, 알아도 따지기 어렵다. 나 또한 서너 차례 인력회사에 전화해 급여 내역을 물었으나 “와서 확인하라”는 답만 들었다. 아직도 내역의 100%를 알지 못한다.
현재의 근로기준법도 버린 이들이 5인 미만 업체의 노동자들이다. 심야수당, 연장가산수당, 퇴직금이 전혀 없다. 실직이 빈곤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당장 안산의 반월·시화공단에서도 적지 않은 이른바 ‘마찌코빠’(소규모 제조공장)와 수많은 음식점, 대형마트 입점 점포, 개인병원 등의 노동자가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시급 4천원(법정 최저임금)만 주면 된다. 5인 미만 업체는 고용 주체가 영세할 수 있다. 그러면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서 생긴다.
◎ 각주
(1) 실제 최저임금 수준을 견주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은 멕시코와 함께 최저임금을 최저로 주는 국가군에 속한다. 2005년 임금총액 평균값 대비 최저임금 비율을 따지면 한국은 25%, 멕시코는 24%다. 터키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보다 뒤진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아일랜드는 40~50% 수준이다.
(2) 아니다.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모두 10시간을 일했다면, 초기 2시간은 기본급, 심야수당이 적용(밤 10시~새벽 6시)되는 밤 10시~새벽 4시까진 1.5배, 심야수당과 연장가산수당(8시간 근무 외 수당)이 적용되는 4~6시까진 2배다.
(3) 충북 제천 출신의 유지원(30·가명)씨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일요일 근무는 안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를 사귀려면 일요일 근무를 빠져야 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는 대전에서 야간 실업고를 다니면서부터 공장 노동을 해왔다. 7년여 전 수원으로 이사왔다. 언제나 최저임금이었고, 그 상태에서 100만원을 넘게 벌려면 종종 철야까지 해야 했다. 그는 “워낙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라인 안에서 많이들 사귄다”며 “우리끼리는 달리 보지 않아요. 외부에서 우릴 달리 보지”라고 말했다.
‘노동 OTL’ 1부를 읽고…
노동 디스토피아, 그래도 희망을 꿈꾼다
1970년대의 미싱이 전동 드라이버로 대체됐을 뿐,
여전히 일해도 빈곤한 역설 바꾸는 계기 되길
“사회학자의 꿈이지요.”
현장에서 한 달간 직접 일해본 뒤 기사를 쓰겠다는 <한겨레21>의 ‘야심찬’ 기획에 대한 필자의 첫 대답이었다.
1년 단위로 연구성과를 평가하는 탓에 참여관찰은커녕 심층면접조차 어렵다. 한두 달만이라도 현장조사를 하고 싶은 간절함은, 제출해야 할 5~6개의 과제와 기타 관련 업무까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주말·휴일·휴가까지 반납해야 하는 일상 앞에서 희미해진다. 필자만이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한 달이 운명이 아닌 오직 ‘실험’이어서 다행”이라는 첫 기사를 “이 글이 내 일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바꿔 읽으면서, 너무 힘들어 “‘기자인 게 들통 나라’ ‘단전돼라’ 애절하게 주문했다”는 기사가 1970~80년대의 노동 현실과 겹쳐지면서 ‘꿈’이라고 말한 것이 슬그머니 부끄럽다.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그것에 밀착한 연구조차 하지 못하면서 ‘사회학자의 꿈’이라니. 필자 역시 매일 “악몽”이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어느덧 멀어진 것인가.
내가 아니라 안도하며 느끼는 부끄러움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탈산업사회의 도래>에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세계적인 산업구조 변화와 기술발전이 지식노동을 낳고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기술과 지식이 만개해 인간의 노동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뀐다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비전은 달콤하다. 무조건 믿고 싶다.
하지만 10명 중 4~5명꼴로 비정규직인 한국 사회는, 탈산업사회가 시장에서 유리한 것만 인정하게 되어 결국 일자리를 잃는 많은 사람들을 방관할 것이라던 비관론의 손을 들어준다. 자본의 구미에 맞는 대로 노동시간과 고용형태가 바뀌어 기업은 새로운 교대제·분할근무·당번제·주말작업을 이용하고, 파트타임·임시계약·용역이 대세가 된다는 주장이 점괘처럼 들린다.
게다가 경제위기의 충격조차 ‘양극화’한 2008년의 경험은 또 다른 충격이다.
1997년 경제위기 때는 정규직과 유사한 상용 일자리가 가장 많이 줄어들고 뒤이어 일용직·임시직·자영업이 무너졌다. 모두가 고통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경제위기 때는 상용 일자리만 밤새 안녕하다. 남성보다는 여성 일자리가 수십 배 더 감소했고 청년층 일자리 역시 위태롭다. 지난 10년간 비정규직과 근로빈곤(working poor) 계층은 경제위기의 충격마저 온전히 겪고 있다.
정규직 노동에 익숙하고 성장이 곧 고용이자 복지이던 시기의 지식으로는 현상 해독조차 어렵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옛말일 뿐 ‘젊어서 비정규직으로 고생하면 죽어도 비정규직’이다. <걸리버 여행기> 속 천공(하늘)의 섬 라퓨타에 사는 사람과 라퓨타에서 버린 음식물로 연명하는 지상의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이 한국에서는 불과 10여 년 만에 만들어졌다.
또한 통계수치가 외형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숫자에 가려진 노동과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현상에 대한 이해와 원인 분석, 대안 모색을 위한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하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현장에 밀착한 연구조사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21>의 기획 기사는 때맞춘 출발이다. 그것이 연구자의 몫이어야 한다는 비판을 잠시 접는다면 말이다.
현장에 밀착한 연구조사 필요
이번 기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뀌었으나 바뀌지 않은’ 노동 현실을 공장 안의 일자리만이 아니라 공장 밖의 삶으로까지 넓혀 ‘일자리의 질’ 측면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차원까지 포괄해 일자리의 질을 정의한 유럽연합 등의 국제기준에도 부합하다.
가령 “1970~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이고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이겠으나 일자리의 질은 비슷하다. 보람도 사회적 자존감도 없고 일하는 동안 인간임을 잊어야 한다. 1분을 지각해도 30분치 시급을 공제하고 일자리 가격은 최저임금에 의해 결정된다. 반장의 눈치를 보느라 옆자리 동료에게 말 걸기가 어렵고 하루이틀 지나면 활발했던 사람조차 말을 잃는다. 과거 노동의 세계엔 앉아 일하는 미싱사와 서서 일하는 시다, 두 부류가 있었다면 현재 노동의 세계엔 “서서 일하는 저주받은 자와 앉아 일하는 복된 자” 두 부류만 있다. 과거 노동자들의 취미가 가리봉 시장 쇼핑과 술 먹기였다면 현재 노동자들에게는 PC방이 추가된다. 그래도 청춘 남녀들은 잔업이 끝나면 몸단장하고 눈을 빛내며 공장을 나선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기숙사의 겨울 새벽 4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던 노동자의 자식들이 부족한 잠을 쪼개 미장원에 간다.
일부 일자리만의 현실일까?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상당수 일자리가 자율성과 창조성, 자존감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다양성을 제거한 동질성, 자율을 거세한 통제, 여기에 환경파괴, 비인간적 노동환경까지 경제적 효율성의 대가로 사회적 비효율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만약 그렇다면 저임금 단순노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노동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괄 라인의 로봇 작업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기사는 유토피아를 희망하면서도 디스토피아의 우려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1970~80년대 노동자들은 적어도 미래를 꿈꾸었다. 동생의 학비를 위해 진학을 포기한 누나, 하루 종일 거친 욕설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시다, 목에 낀 때를 벗기느라 삼겹살에 소주를 들이붓던 건설노동자 모두 잘살게 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50~60대 아주머니들이 당시의 노동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은 노동이 수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노동자는 미래가 없다. 바로 옆자리의 어머니·아버지뻘 노동자의 현실이 자신의 미래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한번 빠진 수렁은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이고 “빚-비정규직-빈곤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에서 평생 쳇바퀴를 돌아야 할지 모른다. 날품노동과 정규직, 반장을 구별하는 옷 색깔은 평생을 구분하는 사회적 낙인일 수 있다. 노동빈곤이 사회적 빈곤인 현실에서 희망은 사치일지 모른다.
70~80년대 노동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유
대안은 있는가? 지구인의 몸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의 지배에 맞서는 것이 사람의 몫이듯, 경제에 휘둘리는 사회의 자기 보호운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든다고 칼 폴라니는 웅변하지 않았는가. 대안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역사는 인간에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한다. 부족하더라도 ‘보호 없이 일자리 없고, 일자리에 차별 없다’는 정책 실현이 그것일 수 있다.
우선 실직 때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는 35%의 취업자를 위해 제2의 사회 안정망을 만들어야 한다. 실직할 경우 빈곤가구가 될 확률이 52.9%인 것처럼 한국에서 실직은 곧 빈곤이다. 실직시의 생활보호와 직업훈련 대책을 사회보장에서 배제되는 800만 취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일이다. 자민당 정부 때 ‘생활안전 취직지원금’ 명목으로 고용보험을 받지 못하는 취업자들에게 1인당 6개월간 176만엔(약 2200만원)을 대부해줬다. 6개월 뒤 6개월 이상의 취업이 이뤄지면 거의 대부분을 상환 면제한다. 상환때도 금리 1.5%로 10년간 갚으면 된다. 노동금고라는 별도의 은행을 신설하고 보증도 필요 없어서 신용불량자가 될 여지가 매우 적다. 민주당 정부는 이 것도 안된다며 정부가 100% 지원하는 실업부조제도로 바꾸겠단다. 국제화의 이점 중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실시되는 좋은 정책을 연구하고 검토해 손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일자리의 질이 낮아 일해도 빈곤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의 기준에 합의를 이끌어내고, 공공 부문 일자리부터 하루 8시간 노동에 사회보험, 퇴직금, 휴가 등은 필수이며 최소 120만원 이상의 월급여가 보장되는 일자리로 바꾸어야 한다. 1년 이상 계속 사용하는 일자리는 고용 보장이 원칙이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 거래를 근절하고 간접 고용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 서울·경기 지역의 제조업 일자리는 파견업체를 통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업체에서 저 업체로 사람을 배달하고 인건비 따먹기가 기업의 이윤창출 원천인 것만은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한국 기업에 미래가 없다.
마지막으로 법뿐만 아니라 노사관계를 통해 비정규직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부부관계를 법만으로 보호할 수 없듯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비정규직까지 포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비정규직 조직률이 3.4%이고 그나마 지속적으로 줄어들어서는 자율적 보호를 기대하기 어렵다.
법과 노사관계 통해 보호해야
<한겨레21>의 기획 기사 ‘노동 OTL’이 대안을 향한 길 찾기의 중요한 출발이기를 희망한다. 걸리고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이스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실낱같은 희망, 함께 이어가요
힘든 작업 속에서도 살가운 눈빛으로 맞아준 동료들이 활짝 웃는 사회를 위하여
안산을 처음 간 날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일자리를 구하겠다면서도 안산역 지하보도에 놓인 구인 전단지를 줍지 못했습니다. 누가 볼까봐요. 인력회사 문을 열기 전 얼마나 주저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볼까봐서지요. 35살, 같잖은 허위의식은 참 쉽게도 무너졌습니다. 2시간만 일하고선 죽겠다며 바닥에 나앉았고, 허겁지겁 점심밥을 식판에 퍼담았지요.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식탐으로 방출될 때마다 소스라쳤습니다.
첫 출근을 한 8월11일 아침 8시, ‘날품’을 라인에 배정하러 왔던 A사 생산부장이 “똘똘한 사람 좀 있느냐”고 한 인력회사 관리에게 묻더군요. 우쭐했지요. 관리가 “없습니다” 합니다. 괜스레 달아올랐습니다. 직접 한 명을 골라가겠다더군요. 또 우쭐했지요. 부장은 쓱 둘러보더니 가장 덩치 좋고 젊은 이를 찍습니다. 또 달아올랐지 뭡니까. 의식은 위약하고, 가치는 그리 자의적인가 봅니다.
그래서 제가 본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젊은 청춘들은 진심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않느냐며, 꼭 작은 가게 하나 열겠다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10년을 또는 수개월을 라인에 선 이들. 그런데도 다른 ‘가치’는 평가받을 기회가 없는 이들….
원곡동과 고잔 신도시, 다양한 층위
여러분의 도시엔 생활DC마트, 외국인, 관광버스, 노래방, 어린이집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관광버스를 타고, 이주 노동자와 함께 가난한 일자리로 갔습니다. 아이는 종일 어린이집에서 여러분의 품을 그리워하고, 여러분은 주말 밤 값싼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노래방에 들러 겨우 지긋한 삶을 털고 있었지요.
극단적일까요? 외국인은 안산역 일대 원곡동, 정규직은 상록수역 일대, 중·상류층에겐 고잔 신도시가 제 영역이며 계급인 듯했습니다. 중앙동 일대가 휘황한 멜팅폿(Melting Pot·다인종사회)처럼 다양한 층위를 떠안고 있었지요. 한 중국인 노동자가 “원곡동은 외국인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싫다”며 선부동에 집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너·나’를 경계짓기 바쁘고, 누군가는 자존을 누군가는 굴욕을 내면화하고 있었지요. 안산만의 얘긴가요? 모든 도시, 그래서 곧 조국이 그런 것을요. 가난(한 자)은 오직 가난(한 자들) 안에서 자유로워 보입니다.
불쾌해 마세요. 전체가 펀펀한 안산은 비록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녹지공원이 많고 한 번도 타보진 못했으나 자전거길도 잘 가꿔져 애착이 갔습니다.
1995년 대학생 시절, 공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입대 전 색다른 경험을 하자 했지요. 라인은 없이 아주머니들과 소녀들이 모여앉아 종이상자만 접는 가내 공장이었습니다. 하루에 1만원이란 얘길 듣고 “미친 짓”이라며 오전에 도망쳤더랬습니다. 그리고 주유소에 갔지요. 사장이 고등학생 직원들을 종 부리듯 해 사흘 만에 다투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만용’이 되네요. 엄마도, 아들도, 딸도 비싼 등록금을 벌려고 버둥댑니다. 고액 등록금의 유일한 매력은 ‘먹고 대학생’ 같은 유휴 노동을 원천봉쇄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근로빈곤은 늘기만 합니다. 생존을 넘어 생활, 생활을 넘어 행복을 좇기가 꿈만 같아집니다.
격려하고 조언해준 많은 사람들
노동에 허덕이면서도 많은 분들이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결근 다음날 “왜 안 나왔어?” 하며 씩 웃어준 반장이 고마웠고, 말 걸어준 아주머니들이 고마웠고, 적의 없이 여러 질문에 답해준 청춘들이, 어쨌건 일자리를 알선해준 인력회사 ㅇ 과장도 고마웠습니다.
사연은 궁금한데 알 길은 없으니, 금요일 퇴근길마다 인사도 안 한 분들께 술 마시자 졸랐습니다. 식사 때마다 혼자 밥을 뜨며, 휴대전화에 노동일기를 기록했지요. 누군가는 ‘미친 녀석’이라고 안타까워해줬을 것도 같습니다. 그 관심도 고맙습니다.
기사를 쓰는 내내, <타는 목마름으로> <청계천8가>를 들었고, 가수 백지영씨의 <사랑 안 해> <사랑 하나면 돼>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시급 4천원짜리 노동과 삶에 대한 기록은 통속이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통속이 진실이었습니다.
한 달은 안산 시내버스 노선을 다 외기도 부족한 기간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 일을 하며, 임금을 시급 5천원, 1만원으로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빈곤노동이 유전만은 되지 않는 내일을 모색해주는 사회가 더 절실함을 충분히 봅니다. 부르길 ‘희망’이라 하는, 오늘 살아야 할 이유가 될 테니까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따위 얘긴, 제 주제에 못하겠습니다. 다들 다치지 말고, 스트레칭도 좀 하시고, 요령도 부려가며 내일도 건강하게 출근하세요. 찬바람 붑니다. 라인이 수만, 수십만 바퀴를 돌면 다시 봄바람이 오겠지요.
추석입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2009년 9월23일 55R라인 9번 임인택 드림
*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한 노동OTL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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