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년 프리터 230만명
‘청장년 프리터’ 230만명
실업난이 만든 프리터…30~40대 알바 는 다
주유소·편의점 등 청소년 알바자리까지
“아무리 일해도 미래가…”
김범석(가명·42)씨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2008년 실직한 뒤 2년째 청소년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한다.
2년 이상 장기간 실업 상태에 있는 등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30~40대가 200만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은 노동시장의 외곽에 존재하면서 임시직 노동(아르바이트)으로 생계를 잇고 있어 이른바 ‘프리터’라 불린다. 우리나라 프리터 실태를 처음으로 조사한 현대경제연구원은 장기실업자 외에도 △시간제·비전형 근로자(파견·용역·재택·일일)나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준비자도 ‘노동의 현재와 미래’가 불안하다는 측면에서 프리터에 포함시키고 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 부가조사’ 결과를 이런 기준으로 나누면, 30대 프리터는 2003년 8월 93만명에서 2009년 8월 110만명으로, 40대 프리터는 79만명에서 120만명으로 늘었다. 전체 프리터는 525만명으로 2008년에 견줘 45만명쯤 증가했다.(2009년 수치는 추정치)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배두성(가명·36)씨는 대학 졸업 뒤에도 취직을 못해 프리터로 눌러앉은 경우다. “편의점 일이 단순노동이긴 하지만 줄곧 서 있어야 하고 손님이 몰릴 때는 정신이 없어 꽤 힘들어요.”
배씨의 생활은 ‘수입은 적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일본식 프리터의 삶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는 편의점 일이 끝나고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대리운전을 하며 밤거리를 다닌다. 하룻밤 많을 때 3만원 정도를 손에 쥔다. 그러나 그의 한 달 수입은 110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주변에 저와 비슷한 나이대에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이들한테는 잘살아 보겠다는 목표의식이 더 이상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주저앉은 거죠.” 배씨는 자신도 삶에 대한 자신감이 계속 줄고 있다고 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27일 “고용환경의 악화와 40대의 퇴직 압력이 가속화하다 보니 중·장년층이 아르바이트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이런 고용 상황은 앞으로도 영향을 미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30~40대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유소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벼랑 끝에 가깝다. 서울에서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를 하는 오성수(가명·39)씨는 적은 돈을 벌더라도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어 한다. 과거 레스토랑,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일하다 ‘노땅(나이 많은) 알바생은 보기에 안 좋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지난 2000년 지방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오씨는 자신을 “낙오자”라고 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칠 뿐이다.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 생활비를 충당할 계획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나,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그는 현재 월세 17만원짜리 고시원에 산다. “많은 사람들이 청년 실업자를 문제삼으면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의 취업 문제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저 낙오자라며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죠.”
이런 자리 경쟁은 한정된 아르바이트 노동시장에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기 때문이다. 30~40대 주부마저 자녀의 사교육비를 벌려고 서점이나 레스토랑, 패스트푸드점 등 10~20대가 선호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젊은 층과 경쟁한다.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일하는 김현숙(가명·44)씨는 “보통 하루에 5~6시간 일하면서 한달에 55만원가량 받아 수입의 대부분을 사교육비에 쓴다”고 했다.
프리터들은 누구라도 ‘탈출’을 꿈꾼다. 3년 전 실직하고 1년 가까이 상품포장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영수(가명·44)씨는 요즘 일을 마치고 저녁 시간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3년 전만 해도 서울의 중견 코스닥 기업의 총무팀 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2008년 봄 회사가 부도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이후 재취업을 위해 수십 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생계가 막막해진 고씨는 결국 아르바이트 시장으로 눈을 돌려 2008년 겨울부터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이후 목욕탕 청소 등을 전전하다 지난해 3월 지금의 포장일을 시작했다. 그는 “힘들어도 열심히 생활하는 내 모습을 보며 딸아이가 잘 성장해주기를 바랄 뿐”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막연하지만, 희망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다. / 김연기 기자
프리터(Freeter)란?
프리터는 자유(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일본식 합성어로, 일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을 말한다. 1987년 일본의 한 구직잡지가 ‘사회인 아르바이트’를 ‘학생 아르바이트’와 구분하느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장기 실업자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준비자 △시간제·비전형 근로자 등을 이 범주에 넣고 있다.
생계형 알바, 정부선 ‘알 바 아니다’
40대는 사업실패·실직탓, 30대는 취업난에 내몰려
고용·복지정책 사각지대, 계층격차·사회보험 악화
직업훈련 등 대책 마련, 노동시장 진입 지원해야
고용환경이 갈수록 악화하면서 과거 학생들이 일하던 아르바이트 자리에까지 30~40대가 몰리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이 낮고 뚜렷한 대책이 없어 이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27일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포털사이트 ‘알바천국’의 조사를 보면, 지난해 상반기 40대 아르바이트 구직 희망자는 전해인 2008년보다 35.7% 증가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프리터’가 늘고 있는 것이다.
정유훈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30대 프리터는 20대에 아르바이트로 취업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뒤 30대에 들어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40대 프리터는 사업 실패나 실직으로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에 내몰린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과거 30~40대는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도 갈 곳이 있었다. 혹독한 노동조건이지만 남성은 건설현장 일용직이나 운전직 등에서, 여성은 가사도우미·미화원 등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밀려들다 보니, 주유소·편의점 등 젊은층이 선호하는 업종에서 일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
무엇보다 30~40대 프리터들은 정부의 고용정책과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청년실업 대책에선 나이가 많아서, 노인복지 대책에선 나이가 젊어서 제외된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방치할 경우 사회 전체의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단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계층이 늘면 계층간 격차는 더욱 벌어져 사회불안이 가중된다”며 “의료보험료 등을 내는 청장년층이 줄어 사회보험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30~40대 프리터들이 근로능력이 없는 노년이 되면 사회보험 우산에도 들어 있지 못한 상태라 더 곤궁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돈이 모이면 외국여행 등으로 자유로운 삶을 보내는 등 일부 청장년층이 스스로 프리터족을 선택한 상황인데도 정부가 199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대로 두면 사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유훈 연구위원은 “일본은 매년 프리터를 30만명 이상 줄이는 것을 목표로 실직자의 재도전 기회를 늘리고 직업훈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며 “이런 대책에 힘입어 우리와 달리 2003년 이후 프리터가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처럼 중장년층이 일자리 부족으로 아르바이트 시장에 내몰리고 있지만, 지방의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허덕이는 고용시장의 왜곡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소규모 사업장(5~9인)의 부족인력은 7만명에 이르러 부족률이 4.3%에 이른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이다. 정유훈 연구위원은 “정부가 청장년층 프리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중소기업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선 소장도 “정부가 30~40대를 위한 직업훈련을 확대하고 재도전 기회를 늘려, 중장년층의 노동시장 재진입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