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OTL-제4부 서울 A대형마트 ③친구들의 엇갈린 행로
[노동 OTL-제4부 서울 A대형마트 ③친구들의 엇갈린 행로]
멈춰선 무빙워크
히치하이커의 친구들은 히치하이커, 그들이 올라타는 차는 언제나 비슷한 차…
별의 행로는 일찍 정해져버리네
[2009.12.25 한겨레21 제791호]
지난호 이야기
지난 11월, 서울 강북의 한 대형마트에서 젊은 마트 노동자들과 일했다. 그들은 이 점포에서 저 점포로 옮겨다닌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를 손질하는 영철은 아내·딸과 함께 월세 12만2500원의 임대아파트에 산다. 30대 초반의 그는 한 달에 115만원을 번다. 중학교를 중퇴한 영철의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리어카 행상을 했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주방일을 했다.
생선 매대에서 일하는 경수의 아버지는 지방 도시에서 닭을 팔았다. 경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닭공장에서 막칼 쓰는 일을 배웠다. 이제 그 막칼로 생선 대가리를 친다. 그의 꿈은 생선가게를 여는 것이다. 그러나 동네 가게는 대형마트 때문에 모두 망했다. 경수가 가게를 열어 돈을 벌려면 대형마트가 망해야 한다. 마트가 망하면 경수는 가게 차릴 돈을 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가난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A마트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양념 불고기 있어요.” 일주일이 지나자 수식어를 동원할 수 있게 됐다. “맛있는 양념 불고기, 대박 세이~일.” 열흘 뒤에는 박자를 넣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로 오세요. 싱싱한 한우 양념 불고기~이.” 그래도 손님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5년째 일한 철수(가명)는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페로몬이란 단어를 모른다. 아르바이트의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은 개념을 몰라도 실체를 안다. 그들은 몸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페로몬도 그중 하나다. 페로몬은 벌이 벌에게, 개미가 개미에게 보내는 호르몬 신호다. 물건을 팔려는 서민은 물건을 사러온 서민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철수는 목청 높여 소리 지르지 않는다. 매대 앞 통로에 버티고 선다. 그러다 막아선다. ‘돼지불고기를 사고 싶은데, 어디 가면 되지?’라는 페로몬을 풍기는 손님이다. “어머님, 이쪽입니다.” 목동의 손에 코뚜레를 맡긴 송아지처럼, 엄마 손을 잡고 강당에 들어서는 초등학교 신입생처럼, 손님은 철수가 담는 대로 순순히 고기를 산다. 서로 나누는 말도 없다. “어떻게 냄새를 맡지?” 호객을 못해 애간장이 탄 내 물음에 철수는 그저 웃었다. 그도 설명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1. 마트의 존재 회로
페로몬을 잘 맡는 철수도 애간장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사가 안 됐다. ‘신종 플루’ 때문이라는 게 A마트 점원들의 ‘다수설’이었다. ‘여사님’으로 불리는 옆 매대 아주머니는 ‘3개월 할부설’을 내놓았다. “지난 추석 때, 사람들이 카드 3개월 할부로 돈을 썼잖아. 그거 다 갚으려면 1월은 돼야지. 그때까지 쓸 돈이 없는 거야.” 체험에 바탕한 여사님의 분석은 ‘소수설’일지언정 치밀했다.
노동자의 이익은 공익 아닌가
철수는 어느 방송사의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지목했다. 그 프로그램이 양념 불고기의 위생 상태를 고발했단다. 그 뒤로 손님이 뚝 끊겼다. “매스컴이 무섭더라고요.” 철수가 말했다. 하루 9시간씩, 주말도 없이 일하는 철수는 그 방송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의 편이 되어 ‘무서운 매스컴’을 생각했다. A마트 점원들이 알고 있는 매스컴은 제 삶에 귀찮게 간섭하는 권력기관이었다. 30일이 지나도록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를 무섭고 귀찮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기자는 공익을 추구한다. 식품위생 관리는 공익이다. 기자는 그걸 감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A마트에서 나는 새로운 질문에 봉착했다. 마트 노동자의 이익은 공익이 아닌가? 어느 날,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성이 매대를 찾아왔다. 그는 맑은 눈을 갖고 있었다. 하얀 손으로 양념 돼지불고기를 시험관에 넣었다. 그는 본사에서 위생감독을 맡고 있다. 이제 그는 맑은 실험실에 돌아가 돼지의 단백질에 시료를 섞을 것이다.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대장균 따위를 헤집어볼 것이다.
“걸리면 보통 일은 아니죠.” 철수가 말했다. 식약청, 구청, 본사가 수시로 점포의 위생 상태를 검사한다. 맞은편 돼지고기 매대의 어느 점포는 식약청 검사에 걸려 1개월 영업정지를 맞았다. 마트는 빈자리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른 점포가 들어왔다. 1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점포는 영원히 A마트에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 점포에서 일했던 20대 점원도 함께 그만뒀다.
식약청 단속반의 현미경에 잡힌 그 미생물은 돼지를 기른 사람, 도축한 사람, 포장한 사람, 보관한 사람, 그리고 진열한 사람을 거치며 증식했을 것이다. 포장지에 찍힌 유통기한에 따라, 정해진 보관온도 아래, 밀봉된 돼지고기를 목이 쉬도록 구워가며 팔았을 뿐인 마트 노동자에게 그 일은 불가항력이다.
식약청이 제 할 일을 하고, 업주가 제 사업의 활로를 찾는 동안, 마트 노동자는 제 하던 일을 통째로 잃어버린다. 영업정지 처분은 먹이사슬을 따라 마트 노동자의 실직으로 가중처벌된다. 식약청 단속으로 문을 닫게 된 대형마트는 지금껏 없었다. 그런데 오늘 집어간 돼지고기에서 대장균과 타르와 아질산염이 검출되면, 내 이익은 누가 지켜줄까?
계란을 파는 영호(가명)에게 내가 불평했다. “우리도 앉아서 일하면 좋을 텐데.” 넓고 넓은 A마트에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별처럼 흩어져 일한다. 누구도 앉을 수 없는데, 예외가 있다. 계산대 점원이다. “저것도 매스컴 때문이에요.” 멀리 계산대를 보며 영호가 말했다. 서서 일하는 마트 계산대 점원에 대한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한겨레21> 기사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그들에겐 의자가 지급됐다. 다만 그들에게만 지급됐다. 나머지 대다수 마트 노동자는 여전히 서서 일한다. “쇼핑 다 하고 계산대 가서야 사람을 보거든요. 거기만 사람 있는 줄 알지, 우리는 안 보이는 거죠.” 투명인간이 되어 마트에서 일한 뒤에야 나는 의자가 절실한 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기다릴 것인가, 일하게 할 것인가
중년 사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줄을 서서 5분째 기다렸다고 화를 냈다. “지점장, 나오라 그래.” 그는 조금 전, 고추장 돼지불고기 1kg을 사갔다. “이렇게 손님이 많으면 계산대 직원을 더 써야지. 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거야?” 지점장을 나오게 할 능력이 나에겐 없었다. 그는 계산을 마치지 못한 불고기를 씩씩거리며 반품했다. 화내는 손님이 더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 상상을 해봤다. 계산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려면 더 많은 계산대 점원을 채용해야 한다. 그들을 고용해 파견하는 용역회사는 마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마트는 점포의 매출 경쟁을 더 부추길 것이다. 어쩌면 20%의 수수료율을 더 높일 수도 있다. 더 빨리 더 많은 점포가 망할 것이다. 더 많은 노동자가 더 빨리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손님을 기다리게 할 것인가, 노동자를 일하게 할 것인가.
일이 그렇게 풀려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없지는 않다. 마트의 수익을 줄이면 된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매겨 임금을 주고, 점포가 내야 하는 수수료도 인하하고, 대형마트가 좀 덜 벌면 된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에 간단히 압도당한다. “그래도 우리 마트가 잘되는 게 좋죠.” 영호가 말했다. 피로가 덮개를 이루듯 쌓여도 마트 노동자들은 마트 탓을 하지 않았다. 마트가 망하는 게 가장 큰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2.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영철(가명)은 8년째, 철수는 5년째, 경수(가명)는 2년째 A마트에서 일하고 있다. 115만~140만원 정도를 번다. 왜 다른 직업을 찾지 않을까? “공장보다 마트가 훨씬 나아요.” 영철은 봉제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들에게 마트의 비교 대상은 ‘공장’밖에 없었다.
새 직업이 어렵다면 새 마트라도 찾아 옮기는 건 어떨까? “길들여진 거죠. 어차피 평생 일할 것도 아니고.” 철수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마트에서 만난 누구도 제 처지를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게를 열 때까지, 장사를 시작할 때까지,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때까지 잠시만 머물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예상은 그러했다. 그래서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미지의 규칙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그들에겐 있었다. 용기가 부족한 것이 그들의 탓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면에서 그들은 마트를 좋아했다. 공장보다 깨끗하고, 공장보다 자유로운 마트를 좋아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었다.
고용주에 대한 불만도 까맣게 잊었다. 책상물림인 나에게 그것은 수수께끼였다. “지금 사장이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판촉 이벤트 회사에 고용된 영희(가명)가 말했다. 돼지고기 작업장에서 일하는 영철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사장하고는 말이 통하거든요.” 비정규직으로 자신을 고용한 용역업체 사장을 ‘인간적’으로 믿는다고 그들은 종종 말했다. 근로계약서를 썼는지,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사장의 ‘말’을 기억했다. 그들은 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투표소를 가지 않는 사람들
“군대 있을 때 빼면 한 번도 없어요.” 영호는 지금껏 딱 한 차례 선거에 참여했다. 제대 뒤에는 다시 투표소를 찾지 않았다. “내 앞길이 캄캄한데, 무슨 정치 이야기를 하겠어요.” 2년제 대학을 중퇴한 그는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 서로 우스개를 늘어놓는다. “저마다 더 우스운 이야기 하려고 기를 쓰죠.” 영호가 말했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영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어요. 술 취하면 ‘이제 우리 뭐하냐’, 그런 이야기가 꼭 나와요.”
놀이공원에 취업한 대학 선배는 일이 힘들다고 그만뒀다. 학교 평판 나빠지겠다는 걱정이 나온다. 자기 생각만 하고 후배 앞길 틀어막은 놈이라고 욕하는 이가 있다. 그래봤자 150만원인데 취업해서 뭐하느냐는 말도 나온다. 그러고 보니, 함께 졸업한 친구는 대학 연구실에 취업해 130만원을 번다. 실험용 동물을 기르는 계약직인데,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단다. 술 잘 마시던 또 다른 선배는 요즘 ‘서든’하고 있단다. PC방에 죽치고 앉아 ‘서든’ 게임만 한다는 이야기다. 100% 취업률 보장한다더니 왜 대학 나와서 이렇게 사느냐고 누군가 자조한다. 100%? 웃기지 말라고 해라. 마트 아르바이트 소개해주는 것도 취업인가…. 그쯤에서 술자리는 파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정치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네요.” 영호가 말했다.
영희는 지난여름, 촛불집회 때 광화문을 가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역시 기표소의 도장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촛불집회는 어쩐지 재미있어 보였다. “그런데 광화문에 나가면 경찰들이 성희롱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건 딱 싫단 말이에요.” 영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준 것은 어느 법률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실업고 동창이었다. 법률사무소에는 공부를 많이 한 변호사들이 많다. 그들 가운데 누가 공포를 심어줬을까, 나는 생각했다.
정치가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언제 무슨 선거가 있든지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일하느라 투표도 못한단 말이에요.” 내년 지방선거 이야기를 꺼냈더니 영희가 잘라 말했다. 정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강력한 통로라고 나는 말해주지 못했다. 어렵게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다 좋은데 민주노총은 꺼림칙하다고 다들 말하던데요.” 영철이 말했다. 당장의 월급을 주는 사장에게 그들은 더 강하게 끌렸다. 정부, 정당, 언론, 노조가 힘이 되어준 기억이 그들에겐 없었다. 차라리 장차 뒤를 봐줄지도 모를 대학원 졸업생과 친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3. 이너서클
“형님한테 세상 이야기 좀 들어야겠어요.” 대학원까지 나왔다고 내가 말했을 때, 철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찬바람 부는 마트 뒤편 벤치로 나를 끌고 갔다.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술도 한잔 걸치지 않았는데, 그는 제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족, 친구, 동료를 통틀어 철수 옆자리에서 대학원 나온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감정’이 그에겐 없었다. 그것은 철수가 잘 모르는 세상이다. “형님, 좋은 데 가시면 꼭 저를 불러주셔야 해요.” 그를 고용해 월급 200만원씩 주는 사업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잠깐이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철수에겐 친구가 필요했다. 그는 친구의 말이라면 믿었다. 철수가 제대했을 때, 그에겐 하는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이 A마트 양념육 매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철수는 친구 따라 강남 가지는 못하고 마트에 들어왔다. 생선 매대에서 일하는 경수도 친구한테 소개를 받았다. 신문보급소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가 마트로 끌어들였다. 작업반에서 일하는 영철 역시 8년 전 친구 소개로 마트에 처음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새로운 친구가 됐다.
잠시 일할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왔어도 100여만원의 월급은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가난은 상처 입은 피부다. 대단치 않은 자극과 접촉에도 쉽게 곪는다. 마트의 젊은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찾는다. 친구다. 마트에 새 일자리가 생기면 그들은 친구에게 전화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고용보험이다.
친구가 고용보험
‘이너서클’이 있다는 사실을 광수(가명)는 몰랐다. 1년 전 그는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한참 뒤졌다. 숙식 해결 주유소, 일당 주는 전단회사, 급구 패스트푸드 점원은 있는데 대형마트의 구직 알림만 없었다. “대형마트에 자리가 생긴다면 좋겠어요.” 광수가 말했다. 먼먼 은하계 저편에서 마트 은하계 진입을 꿈꾸는 광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코 흘리는 아이 둘을 안고 나왔다. 아이는 어른을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 아빠 광수는 억지로 졸음을 참고 있었다. “잠이 부족해요. 잠을 잤으면 좋겠어요.” 3살, 2살짜리 아이들은 햄버거 가게의 으깬 감자튀김을 말없이 먹었다.
광수에게도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제지회사 차장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름시름하더니 회사가 망했다. 아버지는 53평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를 내놓았다. 대출받은 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퇴직금으로 술집을 차렸지만 미성년자를 출입시켰다가 영업정지 15일 처분을 받은 뒤, 그냥 접었다. 그 돈을 사업하는 작은아버지에게 대줬다가 모두 날렸다. 1997년 겨울 이후, 한국인의 삶은 예고 없이 붕괴하곤 했다. 광수네 식구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은행빚만 1억원이래요.” 광수가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광수는 정확히 모른다. 아버지는 “구청에서 내주는 일”을 한다. 구청 공무원은 확실히 아니므로, 희망근로 사업일 것이다. 어머니는 “스리 잡”을 한다. 여러 물건을 팔러다닌다. 부모 사정에 밝지 못한 것은 제 앞가림이 급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작고 귀여웠고 낯을 가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동갑내기다. “만난 지 1700일 됐다”고 광수는 말했다. 여자는 두 번째 아이를 낳고 9일째 되던 날, 도넛 매장에 일하러 나갔다. 아내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일하러 간다. 광수는 아침 8시에 일어나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낸다. 오전 11시에 도넛 매장에 나가 아내와 함께 일한다. 오후 3시, 아내가 퇴근해 아이들을 데려온다. 광수는 밤 11시까지 일한다.
그래도 지금은 옷장도 있고 서랍장도 있고 컴퓨터도 있는 단칸방에서 산다. 첫째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부는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부부는 찜질방에서 잤다. “원래 안 되는데 특별히 부탁해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재웠다. 2주 동안 그렇게 지내다 힘들게 지금 방을 구했다. “점장님이 인간적으로 잘해주시기 때문에” 당장 옮길 생각은 없지만, 대형마트는 광수에게 좀더 나은 미래일 수 있다. 그래도 마트는 좀체 구직 광고를 내지 않는다. ‘이너서클’이 있다는 것을 광수는 몰랐다. 그도 마트에 가면 좀체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4. 마트 밖으로
하루 종일 고기를 구워 쇳소리로 말하던 영희의 성대가 그때만큼은 촉촉히 젖었다. “제 꿈은요.” 집이 있고, 차가 있고, 통장에 1천만원이 들어 있고, 빵집을 하면서 한 달에 200만원을 버는 것이다. “월 200이면 행복하겠어요.” 그들의 행복은 상류 계층과는 상관이 없었다. 나라가 돌아가는 사정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상상 속에서 행복은 직선이었다. 돈을 모아 가게를 내어 또 돈을 버는 것이다. 월 200만원이면 행복한 그들이 증오와 분노를 품지 않아 참 다행인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다.
언젠가 철수는 치킨집을 차릴 생각이다. 경수는 생선가게를 꿈꾼다.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싶은 영철은 그때까지는 조용히 마트에서 일할 생각이다. 가수를 꿈꾸는 영호는 얼마 전, A마트를 그만뒀다. 새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판촉회사에 고용된 영희는 요즘 다른 마트에서 일한다. 그곳에서도 고기를 팔고 있다. 광수는 아내와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돈 문제, 아이 문제로 짜증내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우주는 반짝이는 별로 가득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들에겐 선택할 것이 많지 않았다. 별의 운행 궤도가 결정돼버렸다. 다르게 태어나 엇갈려 자랐지만, 지금 그들은 서로 닮아 있다.
마지막 날, 일을 마치고 마트 입구에서 철수와 담배를 피웠다. 무빙워크를 타고 마트 밖 세상으로 나왔다. “여기 일 그만두게 되면 꼭 연락해.” “예, 형님.”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서 있는 철수를 나는 돌아보았다. 그의 뒤편에서 무빙워크가 멈춰선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안수찬 기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인턴제 허술함 드러난 가운데 내년 청년 고용 예산은 삭감…
청년실업 반은 고졸 이하, 완전히 새 판을 짜야
“서울 강북의 대형마트에서 일하고 있어요. 당분간 문자나 전화도 안 될 거예요.”
안수찬 기자가 가난한 집안, 낮은 학력의 청년노동 문제를 다루겠다고 한 뒤, 일주일 만의 문자메시지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실려온 현장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몇 년간 만나왔던 청년 노동자의 얼굴이 겹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침 기자가 찾아왔을 때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이르는 노동자의 노동인권 실태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어디를 밑바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곳에서 ‘하인’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그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참담한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던 차였다.
만날 때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참담함
“버스 타고 택배 단지 같은 데를 가요.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나 7시쯤 보내주죠. 학생이라고 하면 7시쯤 보내주고, 학교 안 가는 사람들은, 어른이라든가 자퇴생이라든가, 오래 남아 있을수록 돈을 더 많이 버는 거니까 계속 남아 있고. 반절 이상은 학생이라고 보면 돼요.” 충북 지역에서 야간에 택배 일을 했던 A의 말이다.
“그것은… 손님들을 대할 때 아무리 토 나올 것 같은 손님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급을 더 올려줄 테니 애인이 돼달라는 마초 아저씨들의 더러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죠.” 탈학교 여성 청소년 B의 이야기다. 그는 작은 회사에서 사무보조를 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조금 더 많은 시급을 받았고, 폭언·폭행·성희롱 등에는 여성이 더 취약했다. 수도권의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패스트푸드점·편의점·주유소·식당에서 주로 일했지만, 지방의 청년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시장에서 그들은 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별에 따라, 지역마다, 학교에 다니는지 여부에 따라 상황은 달랐다. 무수한 차이를 보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실태 파악이 어려울 정도였다.
몇 해 전 집을 나온 C는 쉼터에서 생활하며 독립을 꿈꾸고 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원하지 않더라도 독립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지났지만 방송통신고등학교도 다니고 있다. 집을 나온 뒤로 안 해본 일이 없다. 전단 돌리기, 주유소, 편의점, PC방, 식당을 거쳐 몇 달 전에 했던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한다.
피자집에서 일주일에 6일 내내 10시간씩 일하는 D는 몇 년만 참으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일한다. 남녀 구분 없는 휴게실 좁은 책상에 구부리고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피자를 만들고 파스타를 삶는다. 3~4년 동안 이런 생활을 견디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을 하며 참고 또 참는다. 이 피자집에서 일하는 열에 아홉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다.
정부 통계로도 청년고용률 40% 안 돼
‘학력’이라는 스펙조차 애당초 없는 이들은 노동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이제 없다. 학력이라는 커다란 퍼즐 조각 하나를 쥐고 있다 해도 학점과 영어, 자격증, 외모 관리와 성형에 이르기까지 온갖 스펙을 관리하며 퍼즐을 완성하지 않는 한 정규직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11월에 발표한 ‘2009년 10월 고용동향 분석’에 따르면, 청년실업률(15~29살 가운데 지난 일주일 동안 구직활동을 했으나 일자리를 얻지 못한 비율)은 7.5%로 전년 동월에 비해 0.9%포인트 상승했다. 전체 실업률(3.2%)의 2배가 훌쩍 넘는 수치다. 하지만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자·구직단념자 등의 상당수도 청년층임을 감안하면 체감 청년실업률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청년고용률(15~29살의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9.5%로 4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 산정에 문제가 많은 정부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생산가능인구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취직을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청년 고용·실업 대책들은 몇 개월이면 들통날 거짓말 일색이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던 인턴제도의 예를 들어보자. 올 초 기획재정부 장관은 “인턴제도가 정규직 채용으로 연결돼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제도적 보완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며 “인턴십 문화가 앞으로 고용 유지·창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6개월짜리 기간제 노동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6개월 뒤 이들에게 남은 것은 실업급여 수급 자격조차 박탈당한 현실이다. 오락가락 행정 덕분에 어떤 이는 기왕 받은 실업급여까지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정규직 채용으로 연결된 예는 어디에도 없다.
정부가 마련한 청년고용 대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청년인턴이었다. 그 실효성에 대해 우려하던 바가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내년에도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1만3천여 명의 행정인턴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얼마 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부 장관이 “청년실업은 대책이 없다”고 고백까지 한 직후였다.
게다가 내년 국가예산안을 살펴보면 엉성한 대책이나마 대부분 관련 예산이 삭감됐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보면, 정부가 주력하겠다는 ‘청년층 뉴스타트 프로젝트’는 45.5% 삭감, ‘중소기업 청년인턴제’는 20% 삭감, ‘취업장려수당’은 65%를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널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지럽다.
요즘 즐겨보는 개그 프로그램에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있다.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가 경찰서 한쪽에서 졸다가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아저씨! 첫 키스 기억해요?” “그럼요. 기억하죠.” “그럼 7번째 키스는요?” “네~에?” “에잇!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웃음이 빵 터진다. 같이 웃다가 슬며시 입꼬리가 내려간다. 입안이 깔깔해진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만 하지 마!
청년실업자의 50.5%는 고졸 이하다. 학력에 대한 고려와 함께 성·나이·지역 특성을 반영한 새 판을 짜지 않고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청년실업 문제는 학벌주의를 비롯해 급증하는 청년층 자살률, 비정규 노동 등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를 모두 품어 한꺼번에 던지고 있다. 청년층의 노동권 회복과 더불어 교육·의료·복지 등 다양한 사회권 회복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손쉽게 ‘눈높이’를 운운하며 자신들을 모욕하는 사회에 대해 그이들은 이렇게 외치고 싶지 않을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만 하지 마! <이수정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설 민주노무법인 공인노무사>
망치들의 언어로
시를 쓰던 고교시절 이후 일터로 뛰어든 친구 ‘망치’에게…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너의 스무 살을 보았어
지난여름, 우리가 ‘노동 OTL’ 기획을 막 궁리했을 때, 친구야, 나는 너를 찾아갈 생각이었어. 20년 전, 사람들은 ‘망치와 펜치’라고 우리를 놀림 삼아 불렀지. 지금이야 맹꽁이처럼 배가 나와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깡말랐고 너는 다부졌잖아. 너도 시를 썼고 나도 시를 썼지. 나는 장정일이 대구 최고의 시인이라 생각했고, 너는 천만의 말씀 안도현이 최고라고 말했지. 그래도 늘 붙어다녔지.
“계란 프라이로 만날 밥 비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3 때 네가 했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 왜 계란 프라이를 매일 못 먹는지 알지 못했어. 말이 없으시던 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셨지. 항상 말이 없으셨지. 담배를 많이 피우셨지.
네가 건네준 책이 참 많았어. 너는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어. <사이공의 흰옷>이 지금도 기억나. 그 책에서 남방 아시아의 고등학생들은 제 뜻대로 제 의지대로 삶을, 세상을 개척했지. ‘넘어, 넘어’로 불리던 책도 읽었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제목이 너무 벅찼어. 우리는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다 믿었지. 몰랐던 것은 오직 두려움이었고, 너와 나는 세상을 다 이해했다 믿었지.
서울에 올라와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만났어. 그것은 밤새 포커를 치고 다음날 수업에 빠져도 되는 자유였지. 하숙방에 돌아오면 법대를 다니던 형들이 모여 있었어. 고시 공부의 스트레스를 푼다며 그들은 매일 밤 포커를 쳤지. 나도 옆에서 그 놀음질을 배우며 낄낄댔지.
스무 살의 여름이 생각나. “이게 도어 프레임이야!”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봤어. “이게 내가 만든 도어 프레임이라고!” 자동차는 울산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여름에 처음 알았어. 그것은 대구와 구미와 경산의 수많은 하청 공장들이 부품을 만들어낸 다음에야 울산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지. 어린 시절, 수학여행 때 본 거대한 공장은 거대한 위선이었지. 내가 포커나 치고 앉았던 스무 살의 여름 내내 너는 지방 도시의 작은 공장에서 자동차 문짝을 만들었지.
그렇게 돈을 모아 도서대여점을 열던 날을 기억하지? 사장이 됐다고 내가 축하했던가? “동네 깡패가 먼저 오고, 경찰이 나중에 왔다”고 네가 말했지. 그나마 떡값도 오래 주지 못했지. 대여점이 망한 뒤, 너는 많이 변했어. 술에 취한 너는 유난히 외로워했어. 나는 여전히 이해 못했지. 땀과 세월에 찌들기 시작한 20대 중반의 네 주변에 수다를 섞어볼 젊은 여자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화를 냈지. 네 동생이 기르던 ‘골든 레트리버’도 눈에 선하구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알바해서 번 돈을 네 동생은 송아지만 한 개를 사는 데 다 써버렸지.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그저 덤덤했어. “내버려둬. 그게 유일한 즐거움이야.”
빛의 속도로 달려온 너의 서른 이후 즐거움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지. 너는 동네 슈퍼에 물건을 대주는 도매업자 밑에서 일했지. 사장은 납입 액수가 틀리다며 너를 많이 닦달했지. 신용불량자가 된 너는 비닐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도 일했지. 햇볕 아래서 등짐 지느라 네 얼굴이 새카맣게 탔지. 아, 그 뒤로도 오랫동안 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직업에 올라탔다가 내려왔지. 그렇게 나이를 먹었지.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내려가도 어쩐지 잘 못 만나지는 나이가 되어버렸지.
친구가 차린 목공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 얼마 전에 들었어. 네가 읽은 책을 읽고 네가 쓴 시를 베껴 썼는데, 우리의 언어가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어리석은 나는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어. 그래서 취재를 핑계 삼아 네 곁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어. 지난 세월을, 우리가 이해했다 믿었던, 넘어서려 했던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어.
고작 한 달의 경험으로 그걸 대체할 수는 없었어. 그렇지만 나는 수많은 ‘망치’를 봤어. 수많은 네 스무 살을 봤어. 세상 물정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나는 너한테 별로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어. 별 힘이 되지 못했지. 이제라도 그걸 만회하고 싶었는데, 나의 지혜와 노력은 여전히 부족해. 그래서 철수와 영희에게, 영철과 경수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편지를 쓰지 못하겠어. 해법은 보이지 않고, 문제만 무수히 튀어나오는 현실이 너무 벅차구나. 그 문제들은 기다렸다는 듯 내 경험과 상식을 흔들고 비웃고 무너뜨렸어.
그래도 조심스럽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친구야. 이제야 나는 너와 대화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아. 네 말을, 네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우정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망치들’의 언어로, 입장으로, 경험으로, 관점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들이 쳐올린 장벽을 망치로 두들기면서 우리 사회의 연대를 더 높이 더 굳건히 쌓아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내년에는 좋은 각시 만나 장가가라. 발바닥은 내가 도맡아 때려줄게. 돌아가신 아버지도 손자가 보고 싶으실 거야. 이번 설에는 소주 한잔 하자.
2009년 12월18일
서울에서 펜치가
*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한 노동OTL에서 퍼온 글입니다.